[다산칼럼] 무더운 여름 밤의 우화 (寓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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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병 주 < 서강대 명예교수 >
여우 한 마리가 들판을 헤매다 지치고 목이 말랐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가 드디어 열매가 탐스럽게 달린 야생 포도덩굴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열매가 너무 높은 가지에 달렸다.
뛰어올라도 보고 덩굴을 흔들어도 보았으나 허사였다.
낙심천만,그대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여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건 분명 신 포도일거야." 다음 날 키가 크거나 나무 오르기에 재간있는 동물들이 찾아와 포식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해마다 열매가 풍성하게 열릴 수 있었다.
요즘 여우는 옛날과 달리 사뭇 영악스럽다.
여러 번 시도해도 실패하자 잔뜩 화가 난 여우가 나무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면서 말했다.
"내가 못 먹는데 어느 놈이 먹어." 그 후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몹쓸 여우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기보다 키 큰 여우들을 멸종시키기로 했다.
이름하여 키 평준화 정책이라 했다.
저멀리 남태평양 한가운데 조그만 섬 나라가 있었다.
고작 100여 세대가 옹기종기 한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처음에는 모든 부락민이 공동생산 공동분배하는 방식으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다.
차츰 사람마다 재능에 따라 직업이 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물물교환이 생겨났다.
주민 대다수가 고기잡이와 밭농사에 종사했으나 몇몇은 옷 만들기,구슬장식 만들기 등에 전념했다.
다수의 농어업이 "하늘 아래 큰 뿌리"였고, 한두 사람이 종사하는 수공업은 곁가지였다.
그러다가 추장이 동네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문명이 발달된 큰 섬으로 유학을 보냈다.
얼마 후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이 관리로 임명되자 큰 섬의 선진 문명세계에서 습득한 지식을 고국을 위해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불타는 정열은 섬나라 산업을 하루가 다르게 발전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대와 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배워 온 독과점규제를 고지식하게 시행한 결과,시장점유율이 몹시 높을 수밖에 없는 섬나라 수공업 구멍가게 공장이 모두 문닫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대신 이웃 큰 섬나라에서 들어온 상품들만 잘 팔리게 됐다.
화가 난 추장이 청년 관리를 내쫓고, 이웃나라와 상품교역을 금지했다.
다시 고립국으로 돌아간 섬나라 경제가 시들해졌다.
마침내 추장이 다른 청년을 뽑아 유학을 보내 보기로 했다.
그 역시 경제학을 전공하고 돌아왔다. 그 섬에서만 자라는 무지개 빛깔 진주조개를 양식ㆍ가공하는 등 특산품을 개발하도록 주민들에게 권장했다.
작은 섬나라 안의 시장점유율에 개의치 않았다. 나라마다 싸게 잘 만들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해 서로 거래하면 모든 나라에 이롭다는 말로 추장을 설득했다. 이웃나라와 물길을 다시 열었더니 과연 특산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진기한 외국 물건이 들어왔다.
모든 주민들의 생활이 윤기가 돌기 시작했고 추장의 조세수입도 늘었다. 물론 제일 갑부는 무지개 진주조개 가공업자였고,그와 대다수 주민 간의 소득격차가 점점 크게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배 아픈 유행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최고 권력자인 추장조차 문득 갑부를 시샘하는 마음이 생겼다. 포도덩굴 뽑아버린 여우 마음을 닮아가는 주민들의 정서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방금 주민투표에 의한 민주주의가 도입된 터였다.
이때 마침 추장이 보낸 세번째 유학생이 돌아왔다.
그는 갑부의 독점사업의 이익을 빼앗아 주민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개혁조치를 추장에게 건의했다.
그리 되면 주민들 골고루 잘살 수 있고, 조세수입도 늘어날 수 있다는 말에 추장이 솔깃했다.
그 후 상품의 질과 양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과연 주민 모두 잘 살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독자들이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잠을 설치며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