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예고된 금융사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교통사고의 1차적 책임은 사고를 낸 당사자에게 물어야 한다.그러나 같은 지점에서 사고가 반복된다면 도로에 이상이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폴 크루그먼이 한 얘기다.
'금융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국제금융시장의 시스템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최근 발생한 국민은행과 조흥은행 직원의 CD(양도성예금증서) 횡령 사건은 크루그먼의 이 얘기를 상기시킨다.
금융시장에 놓인 CD라는 도로에서 대형 사고가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는 1992년 옛 상업은행 명동지점장이 돈이 입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자원 CD를 발행하다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고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장영자 사건,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사건 등에서도 CD가 등장했다.
또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뇌물 수수에 동원된 것도 1억원짜리 CD였다.
좀 더 가까이로는 2001년에 농협출장소장 등 9명이 짜고 CD 등으로 고객 돈 50억원을 인출해 달아난 사고가 있었고 2003년 5월에도 조흥은행 직원이 금고에 보관 중이던 CD 11장(500억원)을 위조해 원본을 사기단에 넘긴 사건이 발생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6월 기업은행에서 300억원 규모의 CD 사기사건이 터졌다.
도로에 비유하면 CD는 가히 '금융사고 다발(多發) 지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고가 빈발하는 'CD도로'의 관리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금융감독 당국이다.
일찌감치 도로를 보수해서 사고요인을 제거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감독 당국은 그동안 CD도로의 사고 위험을 방치해 왔다.
1984년 처음 도입된 이후 CD의 제도 변천사를 살펴보면 발행기관 확대,최저액면 금액 인하,발행금리 자유화,만기규제 완화 등 주로 시장 확대차원의 조치만 있었을 뿐 유통과정에서의 금융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는 거의 전무했다.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CD 위조와 관련해서는 사전에 대형 사고의 조짐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년에 서울지방경찰청이 50억원대의 CD 위조범을 검거한 적이 있고 올 2월에도 100억원대 CD 위조단이 대구지방 경찰청에 검거된 사실이 있기에 하는 얘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채시장에서는 이미 두세달 전 가짜 CD 경계령이 내려졌었다"고 하는 시장 관계자들의 얘기다.
명동의 한 사채업자는 "올해 초에 '가짜 CD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실제로 사채업자 몇 명이 1억∼2억원짜리 가짜 CD에 당하고 나서는 CD 할인영업이 실종된 상태"라고 전했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감독당국과 은행들의 금융사고 예방태세는 사채업자만도 못한 수준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감독 당국은 뒤늦게나마 CD유통 체계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에는 금융사고에 대한 걱정없이 안심하고 통행할 수 있게 하는 도로보수가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임혁 금융부장 limhyu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