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일가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가족기업(Family Firm)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잇따라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통합으로 시장이 갑자기 넓어진 유럽에선 비상장을 고집하다 규모의 경제를 살리지 못해 회사를 넘기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미국 등에서는 창업주의 재혼 등으로 인한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불씨가 돼 기업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미디어 회사인 뉴스코프가 창업주인 루퍼트 머독 회장의 둘째와 셋째 부인 간 경영권 다툼으로 장남인 라클란이 부회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흔들리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3일 보도했다. ◆유럽 가족기업들의 수난 가족기업은 특히 유럽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로화를 단일화폐로 쓰는 유로존의 출범으로 유럽시장이 갑자기 확대됐지만 경영권 유지를 위해 기업공개를 꺼리는 가족기업들은 기업 규모를 불리지 못해 경쟁력을 급격히 잃고 있다. 또 프랑스 정부에서 '내셔널 챔피언'을 주창하고 있는 데서 보듯 유럽 각국이 미국과 중국에 맞설 거대 기업을 육성하고 나서고 있는 것도 가족기업에는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 프랑스의 샴페인 생산 및 호텔업체인 테텡제는 지난 7년간 미국 월가 투자은행들의 인수 시도를 잘 방어해왔지만 지난달 결국 스타우드캐피털그룹에 매각되고 말았다. 회사 경영과 관련,창업자 가족 구성원 간 의견 대립이 극심했고 프랑스 정부가 부유세(wealth tax) 제도를 도입하면서 매출이 급전직하로 떨어진 탓이다. 또 프랑스의 대표적 투자은행인 라자드의 창립자 미셸 데이비드-웨일은 일가 내에서 후계자를 찾지 못해 결국 경영권을 월가 투자자에게 넘겨야 했다. 한때 미국 펩시코에 인수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던 프랑스 유가공업체 다농은 창업자인 안토니 리보드가 2세인 CEO 프랑크 리보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데 실패한 데다 경영실적도 나빠져 해외 투자자를 물색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를 위해 M&A 방어수단이었던 독약조항(포이즌 필)도 최근 없앴다. 이탈리아의 패션 명가(名家)인 구찌도 1980년대까지 급성장했지만 창업 3세에 이르러 가족 간 불화로 경영위기를 겪어 1990년대 초에는 파산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창업자와 2세의 갈등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창업자와 2세간의 갈등도 가족기업의 '장수'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미국 미디어그룹인 비아컴은 섬너 레드스톤 회장(82)이 고령에도 불구,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아 아들 브렌트가 회사를 떠난 케이스다. 레드스톤 회장은 여전히 지분 71%를 갖고 있지만 후계구도는 불투명하다. 홍콩재벌 리카싱의 아들 리처드도 아버지 회사 허치슨 왐포아를 나와 PCCW란 통신사업체를 설립,아버지 리카싱과 경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미국 케이블TV 업체인 아델피아 창업자 존 라이거스와 그의 아들 티모시 라이거스 재무담당최고임원(CFO)은 분식회계와 공금횡령으로 제소돼 작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아델피아는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매물로 나와 있다. 가족기업은 창업자의 주인의식,강력한 리더십,신속한 의사결정 등 장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가족 내 갈등,외부인력 활용 미흡,경영권 분쟁 등의 문제점도 심각하다. 노스웨스턴대 켈로그스쿨의 존 워드 교수는 "가족기업이 분쟁 없이 2세나 3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경우는 전체의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며 가족기업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했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