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세가 전혀 없거나 매우 미미한 수준인 곳,외환 거래를 포함한 금융 거래 전반에 관한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는 곳,국가 간 조세 정보 교류에 극히 소극적인 곳….조세 피난처를 설명할 때 따라붙는 문구들이다. 이 밖에도 저렴한 회사 등록 비용,하루 이틀이면 해결되는 손쉬운 무자본 회사 설립,최소한의 회계 규정 등 조세 피난처에는 외국 기업과 자본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조건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이런 조세 피난처의 매력적 요소들을 악용하는 기업들로 인해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조세 피난처에 설립되는 회사를 일반적으로 역외회사(off-shore company)라고 부르는데 이런 역외회사들 중 상당수가 탈세와 돈세탁을 위해 꾸며진 실체 없는 명목회사인 경우가 많다. 최근 투기 펀드인가 아닌가를 놓고 논란이 되었던 소버린은 조세 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둥지를 틀어 놓고 투자대상국 세법의 허점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는 기업이다. 제일은행 매각 후 1조원이 넘는 차익을 남긴 뉴브릿지캐피탈의 경우도 한국과 이중과세 방지 협약이 체결돼 있는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섬에 설립해 둔 명목회사를 통해 과세 회피를 했다.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세금을 회피하는 투기 자본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재정경제부 자료에 따르면 1992년 국내 자본시장 개방 이후 올 2월까지 6대 조세 피난처를 통해 국내에 유입된 투기성 자본의 규모는 10조원으로 같은 기간 중 외국 자본 주식 순매수 금액의 16%를 넘는다. 외국계 자본뿐 아니라 국내 자본들까지 조세 피난처를 통해 국내 투자를 하면서 세금을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국세청 조사에 따르면 조세 피난처를 통한 국내 기업의 세금 탈루액은 매년 280억원 이상에 달한다. 문제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폐해를 막을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에서 추진 중인 방안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명목회사의 실제 투자자가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지를 추적해 이에 따라 과세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제3국 거주자가 조세 피난처를 거쳐 국내에 투자했을 때 조세 조약상의 비과세 또는 제한세율 적용 혜택에서 제외토록 한다는 내용을 법률에 명시하는 방안이다. 또 다른 방안은 이중과세 방지를 규정하고 있는 외국과의 조세 조약을 개정,특정 조건에 해당하는 외국 자본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세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상대국과 조세조약 개정을 협의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지난 4월 있었던 '주식 5% 룰' 강화 사건에서 보았듯이 이런 조치들은 외국 자본 전체에 대한 차별로 인식돼 외국 투자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외국과의 조세조약 개정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국에 상당한 반대 급부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개정이 이뤄지기 어려울 뿐더러 우리가 아무리 개정을 요구해도 상대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초 있었던 말레이시아와의 협상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불법 자금의 온상지로 알려진 말레이시아 라부안 섬을 조세조약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취지로 말레이시아 정부와 협상을 가졌지만 무위로 끝났다. 조약 개정으로 예상되는 말레이시아측 손실에 대해 우리측은 조약 개정의 타당성만을 주장했지 특별한 제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62개국과 이중과세 방지 협약을 맺고 있는데 조세 피난처를 두고 있는 나라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 이러한 조세 조약의 대부분은 외자 유치가 절실했던 1970~80년대 체결된 것이어서 불리한 조항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에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활발하지 않던 때라 조세 피난처로 인한 폐해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을 중심으로 조세 피난처로 인한 폐해의 심각성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OECD에서는 '유해조세 경쟁포럼'을 만들어 조세 피난처 정부에 대해 유해 조세제도를 폐지하고 세금과 관련된 은행거래 정보 교환에 응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런 국제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조세 피난처를 이용한 탈세와 돈세탁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조세 피난처가 기술 유출 통로로까지 활용되고 있다. 제도 개선이나 외국 정부와의 협상 노력은 물론 외국계 거대 투기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국내 기관투자가 및 토종 펀드 육성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때다. 오영일 경제연구그룹 책임연구원 ohyi@lge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