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터져 나와버린 진실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며 "특별법을 만들어 테이프 내용의 공개 범위를 정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9일 특별법을 발의했고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 4당은 특검법을 발의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음모설까지 확산되는 등 온나라가 불법도청 정국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인기영합주의로 흐르고 있는 최근의 정치권 분위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의 본질은 도외시한 채 여론의 입맛을 맞추는데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국가기관이 국민들을 상대로 해서는 안될 불법도청을 했다는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헌법에 의해 보장된 사생활 및 통신의 자유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침해된 탓에 충격을 감추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국정원이 불법도청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선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야 하고 관련자에 대해서도 엄정한 법적 처리가 이뤄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검찰이 확보한 테이프는 불법으로 자행된 도청에 의해 애초부터 얻어져선 안될 정보가 담긴 것들이다. 때문에 특별법이 됐건 특검법이 됐건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거나 이를 근거로 수사를 벌이는 건 헌법에 위배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궁금해한다 해서 위법적인 것까지 모두 공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알 권리'라는 말로 미화(美化)될 수 있는 것도 절대 아니다. 더구나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려면 도청 피해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많은 법률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어떤 내용의 대화를 도청당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내용 공개를 주장하는 정치권도 바로 자신들이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나서서 반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별법이건 특검이건 이번 사건은 불법도청 행위 자체를 규명하는데 한정돼야지 내용을 공개하는 사태로 번져선 절대 안된다.여론을 핑계로 법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