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 본사 주필 > 해방이 이뤄진 1945년 우리나라의 예금금리는 연 3.4%로 기록돼 있다. 지금보다 더 낮았다. 올해 상반기 중 은행들의 가중평균예금금리는 연 3.46%.한국은행이 펴낸 '숫자로 보는 광복 60년'에 나와 있는 통계다. 물론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경제상황에서 제도상으로 존재한 금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이 사상 최저금리라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지난주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사상 최저수준에 머물고 있는 콜금리를 9개월째 동결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직은 경기상황이 불투명해 연 3.25%인 콜금리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게 박승 총재의 발표다. 경기회복이 이뤄진다는 판단이 확실해지면 지체없이 금리를 인상하겠다는 단서도 달았다. 이를 계기로 금리인상에 대한 논란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사실 우리의 금리운용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리를 올리면 안되는 이유도 그럴 듯하고, 반대로 올려야 하는 명분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초저금리 수준에도 불구하고 경기회복 기미가 전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동안에는 이런 논리가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여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상황이 많이 바뀌고 있다. 미국이 몇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한 결과 미국금리가 우리나라보다 높은 역전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동안의 초저금리 유지에도 기업투자나 민간소비는 늘어나지 않으면서 부동산투기 현상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정부 말대로 경기회복 조짐이 보인다면 지금이 금리를 인상해야 할 적기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근래 들어 금리인상 주장에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득과 실을 따져 국가경제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효과측정이 쉽지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금리가 자금의 수급 조절과 적정배분 등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금리를 올리건 내리건 기대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 없고,따라서 어느 쪽 주장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미 우리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져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금리인하 등 통화완화 정책을 쓰더라도 경제주체들이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에 빠져 투자나 소비심리가 극도로 침체해 있을 경우는 금리가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금리라는 정책수단을 놓고 인상이냐 인하냐의 논란을 벌이기에 앞서 금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상최저수준의 금리에도 기업들이 돈을 빌려 투자를 하기는커녕 빌린 돈을 갚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기업을 옥죄는 갖가지 규제에 반기업정서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걸핏하면 기업인들을 수사대상에 올려놓고 매도하기 일쑤다. 일부 시민단체들의 여론몰이식 '기업 때리기'는 누가 보아도 지나칠 정도다. 정부 정책은 어떤가. 성장과 분배를 오락가락하는 기조적인 문제가 아직도 혼선을 거듭하고 있고,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부동산 정책 등을 접하다 보면 경영의사 결정에서 가장 핵심요소인 정책의 예측가능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뿐만 아니라 소비자들도 혼란스럽기는 전혀 다를 바 없다.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환경이 이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금리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투자할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유동성 함정을 탓하기 전에 '정책함정' 탈출이 더 시급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