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 디지털경제硏 이사장 > 시베리아 바이칼호 가까이 이르쿠츠크의 여름은 생각과 달리 서울과 비슷하게 더웠다. 선풍기만 돌아가는 호텔과 식당들은 서울보다 더 더웠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의 건물들은 퇴락했고 러시아 고유의 문양과 희고 푸른 색으로 채색된 창문만이 파리와 비견할 수 있을까. 선풍기 바람에 땀을 흘리며 러시아식의 거친 점심을 먹고 나오다 우리가 먹고 남은 음식들을 통에 담아 가는 두 모녀를 보고는 1960년대까지 우리들이 먹었던 '꿀꿀이 죽'이 떠올랐다. 어디서 빼 온 건지 모를 굽은 못,낡은 나사와 돌쩌귀,타이어도 없는 자전거 바퀴,앞장이 떨어진 낡은 책을 뙤약볕 아래 펴 놓고 파는 노점 노인의 눈동자에서 절망을 느꼈다. 쓰레기로 버릴 저런 것들을 누가 사며 팔아서 얼마를 벌겠는가.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고 했다지만 레닌의 혁명은 무엇이고 지금의 러시아는 또 무엇인가? 제정 러시아의 압제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소련의 건설은 새로운 공산당의 압제와 가난의 평준화만 남겼다. '배아픔'에서 해방됐는지는 몰라도 '배고픔'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소련이 해체된 지 10년이 지나도 그 질곡은 너무 어둡고 깊어 보였다. 잘못 선택한 역사의 업보는 너무나 가혹했다. 우리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역사의 행운아지만 지금 상대빈곤이라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 소득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실업도 늘어난다. 빈민계층은 40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 강남과 강북의 아파트가격은 자꾸만 벌어진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아픈' 사람은 자꾸 늘어나고 '배고픈' 사람도 아직 많다. '배아픈' 사람들을 위한 특단의 부동산 조치도 준비되고 있다. '절대빈곤'과 '상대빈곤'을 동시에 치료하는 경제학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주류는 '절대빈곤의 경제학'이었다. 빈민계층과 소외계층을 위한 '상대빈곤의 경제학'은 소련의 해체에서 보듯이 아직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절대빈곤'의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지만 '상대빈곤'의 문제에는 확실한 경제학이 없다. '상대빈곤의 경제학'은 어쩌면 경제학의 영역 밖인지 모른다.'배고픔'의 문제는 육신의 문제고 '배아픔'의 문제는 영혼의 문제다.'경쟁'과 '차별'은 인간의 숙명이고 이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라 생각된다. 국민의 행복지수를 보면 지금은 아일랜드가 1위를 차지했지만 한때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뉴욕 중심의 그랜드센트럴역에는 정부의 지원을 마다하고 거지가 득실거리는 것을 보면 '상대빈곤의 경제학'은 정부영역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평준화된 교육과 획일화된 대학입시,강남 아파트 가격을 잡기 위한 종합부동산세,재벌의 출자규제와 수도권의 공장규제 같은 정책들은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과 경쟁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무시하고 만든 '상대빈곤의 경제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선의에서 비롯된 '정부의 실패'가 '시장의 실패'로 이어지고 '시장의 실패'는 또 다른 '정부의 실패'로 이어지는 '상대빈곤의 경제학'이 오늘의 문제다. 일본은 '10년 경제패전'의 원인을 40년 평준화교육에서 찾고 지난해부터 평준화를 깨기 시작했다. 같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전환했지만 경쟁이 있는 중국은 활기가 넘쳤는데 경쟁이 살아나지 않은 러시아는 활기가 없었다. '절대빈곤의 경제학'과 '상대빈곤의 경제학'의 타협점은 어디일까. '경쟁'에 따라 개인의 선택을 허용하고,'규제'를 풀어 기업이 투자를 늘려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고,정부는 빈민계층의 '절대빈곤' 해결에 전념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다가 '절대빈곤'만 계속 키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