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광복 60년에 생각하는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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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산 < 소설가 >
우리가 흔히 쓰는 미소는 일본말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웃음이다.
미소와 웃음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경우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말에는 앞에 갖가지 풍부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조용한 웃음,해맑은 웃음,방긋웃음,함박웃음,너털웃음 등으로 얼마든지 골라 쓸 수 있다.
내가 방금 쓴 '등(等)'도 일본말이다.
우리말로 쓰면 '따위'나 '같은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이처럼 글을 써서 먹고사는 나 같은 사람도 자칫하면 일본말, 일본식 표현을 아무 생각 없이 쓴다.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다짜고짜 튀어나오는 게 병든 말이다.
우리말과 글이 얼마나 속속들이 골병이 들었는지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힌다.
일상생활에서 무턱대고 쓰는 일본말 찌꺼기들은 당최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축제 연인 역할 담합 할인 수순 미래,이런 말들도 모두 잔치 애인 구실 짬짜미 깎음이나 내려,차례 앞날 같은 우리말로 바꾸는 게 옳다.
단어만 그런 게 아니다.
문장이나 표현으로 가면 더 기가 막힌다.
우리 문장에서 제일 잘못 쓰는 게 '의'라는 조사다.
이것만 덜어내고 써도 한결 사정이 좋아진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는 '바람소리를 들어라'로, '너의 눈망울'은 '네 눈망울'로,'한 방울의 비에도 기뻐하는'은 '비 한 방울에도 기뻐하는'으로 쓰는 게 맞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 사색'이나 '감옥에서 사색하다'로,아니면 아예 '감옥에서 생각함'으로 고치는 게 훨씬 우리말법에 맞는 표현이다.
'으로부터의''에게서의''에게로의'와 같은 표현은 우리말엔 없는 것이다.
오늘도 TV에서 '국정원은 그러나'라고 엉터리 표현을 쓴다.
'그러나'라는 우리말 접속사는 문장의 중간에 와선 안 된다.
당연히 '그러나 국정원은'으로 고쳐 써야 한다.
피동조동사의 남발도 걱정스러운 수준에 와 있다.
'도청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으로 보여지는' 심지어 이런 황당한 문장도 쓴다.
마땅히 '도청의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보는'으로 써야 맞다.
'기회가 주어진다면'은 '기회가 온다면'의 능동태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
'보다 나은 미래'는 '더 나은 미래','대통령과의 면담'은 '대통령과 면담','시인에 의해 씌어진 시'는 '시인이 쓴 시'로 써야 옳다.
'너로 인하여''나에게 있어 출세란' 이런 표현들도 일본어 방식이다.
'너 때문에''나에게 출세란'으로 고치는 게 맞다.
국정교과서가 틀렸고,국어선생님이 안 가르치고,방송대본을 쓰거나 신문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잘못 쓰고,시와 소설이 잘못되고,노랫말과 뉴스 전달자,정부기관의 공문,수많은 책과 잡지,인터넷이 날마다 그릇된 말과 글들을 봇물처럼 쏟아내니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우리말과 우리 글은 여전히 일본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이 한 신문에 기고한 글 가운데 '한겨레는 가장 정확하고 책임 있게 쓰는 신문사에 속한다'는 문장도 그릇된 표현이다.
'가장'을 쓰려면 '속한다'를 빼야 옳다.
'가장'은 오직 하나에만 붙일 수 있는 수식어다.
게다가 '속한다' 역시 일본말의 전형이다.
'가장 정확하고 책임 있게 쓰는 신문이다'하면 그만인 것을 공연히 '속한다'를 집어넣어서 아주 잘못된 문장을 만들어버렸다.
유명작가나 뛰어난 문장가라는 분들이 쓴 글도 다섯 문장만 읽어보면 어김없이 일제에 병든 말,그릇된 단어와 문장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런 글을 읽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의 앞날은 생각할수록 착잡하다.
여기에 어설픈 영어 번역 투 표현까지 가세해서 겨레의 말과 글은 유사 이래 최악의 위기에 빠져있다.
이것이 광복 60주년을 맞은 한글과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