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進德修業欲及時(진덕수업욕급시).'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본사 25층 사외이사 회의실에는 조순 이사가 쓴 친필 휘호가 눈길을 끈다.


'군자가 덕을 쌓고 업을 닦는 데 있어서는 때에 따라서는 나아가고 때에 따라서는 멈추는 등 신축적으로 해야 하며 항상 똑같이 해서는 안된다'는 뜻의 주역 문구다.


조 이사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같은 취지라고 설명했다.


조순 이사를 포함한 SK㈜ 사외이사들이 사외이사 윤리강령을 선포한 지 1주년이 되는 지난 20일.


창 밖으로 멀리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사외이사 집무실에서 만난 조 이사는 이사회 중심 경영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했다.


"이사회 중심경영이라는 게 요즘처럼 하나의 유행이 되면 곤란합니다.각 기업마다 배경도 다르고 기업문화도 다르니까요.이사회가 적극적으로 경영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회사가 있고 이사회의 역할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기업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기업은 이사회 중심 경영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요."


조순 이사는 "최고경영자(CEO)의 성격,회사의 니즈,업종에 따라서 이사회 운영도 달라져야 하며 사외이사 수를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철저히 실사구시의 정신에 따라 이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


조 이사는 "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이사회가 너무 큰 목소리를 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물론 과거와 같이 거수기 역할만 하면 절대 안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회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체는 이사회가 아니라 최고경영자와 직원들이라는 설명이다.


이사회는 이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투명성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지난해 3월 SK㈜ 사외이사로 선임된 지 약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7명의 사외이사 중 최고 연장자로 최태원 회장과 함께 SK㈜ 이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그다.


조 이사는 지난 1년 반의 사외이사 활동에 대해 "정말로 열심히 달려왔고 결과에도 만족한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임직원들이 회사의 10대 빅뉴스를 선정했는데 '창사 이래 최대 수익'을 제치고 '이사회 중심 경영'을 1위로 뽑았을 정도이니 사외이사들의 성과에 대해서는 새삼 평가할 필요도 없을 듯 싶다.


조 이사는 그러나 "좀 더 연구하는 자세로 임하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쉽다"고 털어놨다.


SK㈜의 내부 구석구석을 좀 더 훤히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설명.그는 그러면서 사외이사가 갖춰야 할 네 가지 마음과 수행해야 할 네 가지 기능,그리고 달성해야 할 네 가지 목표를 또박또박 읽어내렸다.


바람직한 사외이사의 모습을 스스로 정리해본 것이다.


"우선 독립심이 필요합니다.그리고 공정심과 투명한 마음을 갖춰야 하고요.마지막으로 연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 같은 네 가지 마음을 바탕으로 △기업경영의 공정한 의사결정 △CEO에 대한 자문 △회사 운영에 대한 감시 △회사의 인화를 도모하고 이해를 조정하는 등의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사외이사가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는 △주주와 이해관계자의 이익 보호 △기업 가치의 장기적 제고 △사회로부터의 신뢰 획득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 등이었다.


이 같은 '4-4-4 원칙'에다 지난해 선포한 윤리강령만 잘 실천하면 사외이사의 활동은 성공적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경제 부총리,한국은행 총재,국회의원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조순 이사지만 기업 업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은 기업이다'라는 명제를 이론적으론 알고 있었지만 지난 1년 반 동안의 활동을 통해 이를 피부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조 이사는 최근 X-파일,두산가 경영권 분쟁 등으로 반기업 정서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며 "과거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지만 현재는 기업이 천하지대본"이라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제 발전은 기업과 기업가의 혁신에 달려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의 성장 분배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분배 분배 하지만 성장이 없는 분배는 없다"며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커브를 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SK㈜를 놓고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던 소버린에 대한 평가를 내려달라는 질문에 조 이사는 "SK㈜의 이사회를 강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지만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바라는 투자자가 아니라 단기 수익을 노린 투기자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외국자본을 무조건 배척하면 안 되겠지만 투자자본과 투기자본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기자본은 국적을 막론하고 좋지 않다는 것.외국자본 중에 투기자본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조 이사는 "금융감독당국이 자본시장을 너무 급하게 개방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내 주식시장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외국 투기자본에 잠식됐다"며 답답해 했다.


글=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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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28년 강릉생

△1949년 서울대 상과대 졸업

△1967년 UC버클리 경제학 박사·서울대 상대 부교수

△1970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1988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1992년 한국은행 총재

△1995년 서울시장

△1997년 한나라당 총재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바른경제동호인 회장·SK㈜ 사외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