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히,천천히 파도 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김명인 '바다의 아코디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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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사람들만의 개념이다.


파도는 그저 밀려오고 부서진다.


파도에 한숨과 시름을 묻고,파도 속에서 영원을 보는 것도 사람들의 일일 뿐이다.


해변을 서성이던 사람들은 이제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파도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하나씩 씻어내고,해변은 다시 정갈한 몸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맞을 것이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있다.


이정환 문화부장 jhe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