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고 아우성을 치며 열대야에 시달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한강 둔치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벌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듯하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구름 모양도 완연히 달라졌고 등산객의 옷차림도 어느새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절기의 변화는 참으로 오묘해서 오늘이 처서(處署)다. 여름 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때가 되면 농민들은 그 동안 매만지던 쟁기와 호미 등 농기구들을 갈무리하고 여유로움과 함께 수확에 대한 기대에 젖는다. 이를 두고 '어정 칠월'이라 하는데 이제 추수할 일만 남았으므로 이 무렵엔 농촌이 한가해진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마땅히 할 일은 안하고 덤벙대기만 하는 '어정뜨기는 칠팔월 개구리'라는 속담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추수하느라 일손이 바빠 발을 동동 구른다는 '동동 팔월'과는 사뭇 다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의 입도 비뚤어져 잠자리도 한결 나아진다고 하니 오랜만의 편안함이 아닐까 싶다. 처서 기간에는 '포쇄'라 해서 긴 장마중에 젖고 곰팡이 핀 물건들을 말리기도 한다. 농부는 곡식을,선비는 책을,부녀자는 옷을 햇볕에 내다 말린다고 하는데 앞마당에 널려 있는 빨간 고추가 실감난다. 과일로는 복숭아가 으뜸이어서 새악시 볼처럼 불그레한 복숭아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중복에 참외,말복에 수박,처서에 복숭아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처서에 비가 오는 것은 크게 경계했다. 여물어 가는 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게다. 이런 까닭에 "처서에 비가 오면 독안의 곡식이 준다"든가 "입추에 비오면 천 석을 얻고 처서에 비오면 천 석이 준다"는 속담들이 나왔나 보다. 일기예보를 보면 앞으로 큰 더위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부디 가을철 시원한 바람처럼 우리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러 일들이 뒤숭숭해서인지 더위가 돌아갔다는 '처서'가 올해는 유난히도 의미있게 다가온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