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외교문서 공개] '63 大選' 앞두고 전관수역 12마일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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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킨 굴욕외교냐,자립경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타협이냐.'
그간 두 개의 상반된 주장이 팽팽히 맞서왔던 한·일외교 협정의 전모가 26일 공개됐다.
1965년 12월 체결 이후 40년 만이다.
총 156권의 문서철,3만5300여페이지에 달하는 외교문서 전문(全文)이 공개됨으로써 이제 한·일협정은 냉정한 역사의 평가만 남게 됐다.
◆정권논리에 휘말린 어업협정
대한민국의 전관수역을 '12마일'로 축소한 현행 한·일어업협정은 1963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박정희 정권이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대선 이전에 타결,대선에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제6차 한·일회담이 진행 중이던 1963년 8월 정부의 1차 대책회의에서 외무부 정무국장은 "전관수역으로서 40마일 선을 명백히 하지 않고 12마일 외측에 규제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면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
외무부는 또 '12마일 방안 제시가 국내외에 미칠 영향'이란 보고서를 통해 "대선(63년 10월15일)을 앞두고 야당측 공세에 직면해 선거에서 불리해지는 만큼 신 방안의 제출시기는 대선 이후가 좋다"고 제안했다.
9월11일 열린 9차 대책회의에서는 "문제는 정권이냐,한·일문제냐의 양자택일이다(중앙정보부)""정권을 먼저 잡아야 한다.
정권을 잡으면 문제는 해결된다(최고회의)"는 등의 발언이 잇따라 제기돼 한·일협상이 대선전략으로 활용됐음을 반증했다.
◆논란여지 남긴 대일청구권,'김종필-오히라 메모'
한·일회담에서 핵심사안인 청구권 금액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은 1961년 10월20일 개시된 제6차 회담에서였다.
문제는 금액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현격한 의견차.
우리측은 8억달러를 요구한 반면 일본 측은 5000만달러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후 청구권 금액은 7억달러(한국)대 7000만달러(일본)로 좁혀졌지만 일본은 대신 한국측이 청구권 명목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협상은 결국 고위레벨의 정치회담,이른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간의 회담을 통해 타개됐다.
이른바 1962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친 김-오히라 회동에서 일본측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으로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민간차관 1억달러'라는 메모가 작성됐다.
그러나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없었다.
개인 청구권을 우리 정부가 묵살한 대목도 대화록을 통해 확인됐다.
역사문제연구소 이신철 연구원은 "경제개발과 정권안보에 집착한 나머지 개인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국민 개개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협상이 지니는 한계"라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