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는 누굴일까.


몇년 전 한 미술잡지가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등 20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결과는 예상밖이었다.


설문 결과,1950년대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내고(乃古) 박생광(1904∼1985) 화백이 단연 1위를 차지했다.


내고는 일반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작가다.


이중섭 박수근 같은 국민화가들을 제치고 그가 미술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요인은 독자적인 화풍으로 한국 문화를 그림에 담은 '역사화(畵)'를 추구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진주 태생인 내고는 1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25년간 일본에서 활동했다.


해방되던 45년 귀국했지만 그림에 일본풍이 배어 있다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


그가 우리 화단에서 눈길을 끈 것은 81년부터다.


단군왕검을 시작으로 한 그의 역사화는 민비 시해사건을 담은 '명성황후' '전봉준'으로 이어지고 '청담대종사' 시리즈와 '토함산 일출' 등을 제작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나이 70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빛을 본 것이다.


그는 자연을 주제로 한 동양화 전통에서 벗어나 한국의 역사를 그림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기법상으로도 단청과 탱화 민화 등 토속적인 한국 채색전통을 계승했다.


가로 3.3m,세로 2m에 달하는 대작인 '명성황후'는 구상에만 3년,제작하는 데 1년이 걸린 내고의 야심작이다.


그의 나이 79세인 83년작이다.


조선후기를 다룬 역사책을 탐독한 내고는 명성황후가 불태워졌던 경복궁을 세 번이나 현장답사했다.


향원정 주변을 왔다갔다하면서 "일본놈들이 민비를 이렇게 했겠지?"하며 눕는 시늉까지 했다고 한다.


수차례에 걸쳐 현장을 세밀하게 스케치한 후 내고 특유의 예술성을 작품에 부여했다.


이 그림은 자세히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오른쪽에는 일본군의 말발굽과 서슬퍼런 칼을 쥔 일본 무사들이 등장하고 가운데에 황후의 거처인 궁궐 앞에 있는 향원정이 거꾸로 그려져 있다.


내고는 민비시해가 경천동지할 사건이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 밑에는 힘없이 굴복한 조선군대가 쓰러져 널브러진 처절한 형상이 자리잡고 있다.


화면 곳곳에 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민비가 불타 죽은 사실을 의미한다.


또 왼쪽 하단에 민비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내고는 황후가 아니라 소복을 입은 아름다운 조선여인의 얼굴로 그려냈다.


윤회사상의 영향으로 시해당한 민비가 아름다운 조선여인으로 환생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은 30여년간 내고의 후견인 역할을 해 온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의 증언.


"작품이 완성되자 선생님은 이 그림이야말로 내 최고의 작품이라며 '됐제? 됐제?'하며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에서 '게르니카'와 '명성황후'를 견줘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거든요."


내고는 이 그림이 그의 소원대로 스페인에 전시된 것을 못 본 채 눈을 감았다.


'명성황후'는 2003년 바르셀로나의 성 아우구스티성당에서 전시돼 현지 미술관계자들로부터 찬탄을 받았는데 그림이 제작된 지 20년 만이었다.


김 관장은 '명성황후'를 갖고 싶어 91년에 미술관을 설립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족이 팔 뜻이 없어 대학교수였던 Y씨를 중간에 내세워 6년이 지난 97년에 마침내 뜻을 이뤘다.


그는 "당시 압구정동 30평형대 현대아파트 한 채값을 구입비로 지불했는데 박생광 화백 그림 중 최고 가격에 거래된 셈"이라고 회고한다.


2001년 개관한 이영미술관(경기도 용인)은 박 화백의 유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박물관협회총회'에 참석했던 세계 주요박물관·미술관 관계자 340여명이 명성황후를 보기 위해 이 미술관을 찾기도 했다.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