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칼럼] 실험실 개구리의 위기 불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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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민 < 본사 주필 >
뜨거운 물이 담긴 컵에 살아있는 개구리를 넣으면 금세 뛰쳐나오게 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나 개구리가 놀기 좋은 찬물을 넣어 놓고 이를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뜨거워지는 것도 모른 채 죽어간다고 한다.
환경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매사에 안주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비유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개구리 실험 얘기다.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이 심상치가 않다.
연일 사상최고치를 갈아치우면서 배럴당 70달러마저 넘어섰다.
그런데도 주변에선 '큰일 났다'거나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정부도,기업도,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고유가 대책을 검토한다거나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가 간혹 있지만 과거의 유가폭등 때에 비하면 기이할 만큼 조용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는 최근호에서 이 같은 고유가 불감증은 유가상승이 점진적으로 이뤄진 탓이 크다고 분석했다.
1,2차 오일쇼크 때는 유가가 2배로 오르는 기간이 9∼10개월이었지만 이번에는 43개월이 걸렸다는 얘기다.
에너지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것 말고도 고유가의 파장이 심각하게 부각되지 않는 그럴 듯한 이유는 많다.
과거와는 가격폭등의 원인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 우선 손꼽힌다.
1973년과 78년의 1,2차 오일쇼크는 산유국들의 석유무기화나 수출금지 조치 등으로 촉발됐었다.
말하자면 돈을 주고도 원유를 살 수 없는 상황에서의 급격한 가격폭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값은 비싸졌지만 석유공급은 어느정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의 본질이 다르다는 얘기인 셈이다.
또 상품을 만드는데 드는 원가에서 석유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낮아져 기업경영이나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줄었고,지금까지 다른 상품에 비해 원유가격의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이유도 있다.
예컨대 2차 오일쇼크를 기준으로 보면 세계의 평균 물가상승률만큼 유가가 올랐다면 지금은 배럴당 75달러 정도는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오를 가능성도 크다는 진단이다.
그래도 지금 원유값이 너무 올랐다고 생각하는 보통사람들은 여전히 의구심을 풀기 어렵다.
얼마전 정부가 발표한 올해 상반기 에너지 소비동향 자료를 보면 석유소비가 줄기는커녕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6%나 늘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건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닌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냐는 타박도 있을 법 하지만 그렇게 볼 일만도 아니다.
선진국들에 비해 에너지 효율성이 훨씬 뒤지는 나라가 바로 우리다.
같은 물건을 만드는데 투입하는 에너지량은 우리가 일본의 3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태평스럽기는 우리가 선진국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것 같다.
느긋하기로 말하면 비단 기름값에 관한 것만도 아니다.
정부는 주가도 오르고 산업활동도 조금씩 나아지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식이다.
연정이니 뭐니 해서 벌써부터 선거놀음에 빠져들고 있는 정치지도자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는 사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곤두박질을 거듭해 4%에도 못미칠 우려가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최근 집값 급등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위기를 경고한데 이어,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내년 상반기중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진단했다.
고유가가 더 지속되리라는 게 정설이고 보면 제3의 오일쇼크가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우리 모두 물이 뜨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실험실의 개구리 처지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