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대사의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경술국치일인 지난달 2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인명사전에 실을 1차 명단 3090명을 공개한 것이다. 이 명단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인물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어 적지 않은 놀라움을 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해 조약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공박한 장지연이 후일 변절해 친일활동을 했다고 한다. 장지연의 후손들은 이미 조상의 명예가 부당하게 훼손됐다고 법적 대응에 들어갔다. 이밖에도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인 최린, 도쿄 2·8독립선언서 발표의 주도자였던 언론인 서춘은 애국지사에서 친일인사로 변절한 경우이다. 훗날 최초의 천주교 대주교가 되는 노기남,천도교 교령 이종린,조계종 초대 총무총장(총무원장)을 지낸 승려 지암 이종욱 등 종교계 지도자들의 이름도 놀라움을 준다. 장지연의 후손들이 친일인사 명단에 자기네 조상의 이름이 올려진 것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부당하다고 법적 대응에 나선 것처럼 많은 후손들이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기회에 한국 근·현대사의 파행이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을 단죄하지 않은 데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잡아다 고문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고등계 경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하에서 반공투사로 둔갑,군대와 경찰조직을 장악하고 권력을 쥐게 된 것은 일제 강점보다 더한 역사의 수치다. 반민족행위자가 부와 권력을 대물림한 경우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었는데 단 한 나라,대한민국이 예외적인 국가가 됐다. 그래서 20세기의 지성 장-폴 사르트르는 생애 내내 대한민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편찬위원회의 윤경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명단 발표가 친일인사들의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감춰진 역사,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지 않고 살아가면서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했다고 하여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에 수치심이 느껴지고 어떤 경우 억울한 바가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법적 대응 등은 자제했으면 좋겠다. 어쩔 것인가. 조상이 친일행위를 한 흔적이 명명백백히 남아 있었기에 그 자료에 근거해 선정한 것임에. 참으로 한심한 일은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 땅 되찾기' 소송에서 계속 승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파로서 고위직에 오른 이들,즉 을사오적·을미칠적·경술국적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나라를 팔아넘긴 대가로 일제로부터 땅을 받기도 했지만 제각기 토지 매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예컨대 대한제국의 농상공부대신이었다가 일진회 총재,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된 송병준이 전라도 어디의 비옥한 땅을 사겠다고 마음 먹는다. 누구의 청인가. 그 땅을 갖고 있던 지주 모씨는 시세의 반도 안 되는 싼값에 그 땅을 팔 수밖에 없다. 친일에 앞장서 부와 권력을 당대에 여한 없이 누린 이들의 후손이 조상 덕에 수천평의 땅을 자기 소유로 하여 수백억원을 갖는다는 것이 모순이 아니라 합법인 현실이 너무 슬프다. 60년 동안이나 덮여 있던 우리 역사의 한 장이 이제 비로소 펼쳐졌다. 지금에 와서 친일인사 당사자를 단죄할 수는 없다. 그 후손들을 코너에 몰아넣고 당신 조상이 잘못했으니 하늘 우러러 부끄러워하라고 공박할 수도 없다. 봉인돼 있던 과거사를 백일하에 드러냈다는 데 이번 명단 발표의 의의를 두고 싶다.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우리가 일본의 역사 왜곡을 어찌 당당하게 탓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