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행사가 열린 3일.포도밭의 아침은 언제나 비슷하지만 '포도밭 작은 예술제'가 열리는 오늘은 특별하다. 오전 5시30분에 포도밭으로 간다. 초록잎들이 짙은 옻빛으로 물들어 있는 포도나무.내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본다. 일기예보로는 한때 소나기가 온다 하는데 하늘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5시40분.잠든 포도나무가 깨지 않도록 가만가만 포도를 딴다. 오늘 행사에 참가하는 시인들에게 드릴 포도를 따고 있다. 해뜨기 전이라서 포도를 감싸고 있는 흰 봉지가 녹녹하다. 포도나무마다 시인들의 이름표가 달려 있다. 특별히 송이가 커서 알갱이가 작은 이수익 선생의 포도,너무 달콤해서인지 벌·나비가 수시로 날아들던 정현종 선생의 포도,진하게 향기를 뿜어대는 조정권 선생의 포도,유난히 빛깔이 좋은 노향림 선생의 포도,'님은 먼 곳에'를 들려주지 않아서일까? 이문재 선생의 포도는 열매가 부실하다. 벌과 파리가 자주 드나들더니 박주택 선생의 포도는 속이 빈 것이 많다. 짙은 먹빛을 뿜어대는 고두현 선생의 포도,껍질이 보드랍고 단맛이 진한 심언주 선생의 포도. 작년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매달려 있던 김춘수 선생님 포도나무는 올해 포도가 세 송이밖에 달려있지 않다. '너희들은 나무가 아니고 시인이야'라고 중얼거리며 포도나무를 일일이 어루만져 준다. 그러는 동안 초대 시인들의 포도 열다섯 상자를 다 따긴 했는데 걱정이다. 수확 철에 비가 많이 온 탓에 올해 포도는 유난히 시큼하다. 9시30분.야외 공연장에 제8회 포도밭 작은 예술제를 알리는 현수막을 단다. 청솔모와 새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며 기웃거린다. 12시. 시인들이 광목천에 친필로 쓴 시를 시인들의 나무에 건다. 나무들이 시인이 되어 서 있다. 또 하늘을 본다.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비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서정춘 선생께서 술 한 잔 하시고 흰 광목천에 즉석에서 쓰신 '즉흥,포도밭'을 나는 잠시 감상한다. '포도밭 주인아/포도나무 앞에서/이응(ㅇ)/이응(ㅇ)/열 번 백 번을/발음하여라/열 번에 포도송이/응(ㆁ),응(ㆁ),하면서/천 송알 만 송알이/맺히리/포도밭 주인아.' 시인들의 시 곁에서 햇빛,포도 잎,새,벌들이 또 하나의 시가 된다. 2시가 지나자 소설가 서하진 선생을 선두로 시인과 독자들이 포도밭으로 모여든다. 3시 무렵 이수익 선생의 '내 마음 안에 구릉이 있다'를 시작으로 시인의 시낭송과 독자의 질문이 이어진다. 지렁이가 숨쉬는 흙을 맨발로 밟으며 귀를 기울이는 독자들,몰래몰래 포도 따먹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개구쟁이들,이랑을 오가며 감흥에 취해 걷고 있는 문학 주부. 그들의 코끝으로 귀로 눈으로 시,그리고 포도향이 스며든다. 5시10분쯤에는 포도주를 만든다. 포도를 한 알씩 따 넣고 포도알갱이들을 손으로 주무른다. 포도는 마침내 항아리에서 포도가 아닌 포도주로 몸을 바꾸고 있다. 5시30분에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우리 가족이 직접 채취하거나 재배한 채소를 버무려 비빔밥을 먹는다. 6시30분.이제 포도밭은 고요하다. 포도밭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덩그러니 남은 포도나무와 포도 알 사이로 시와 독자의 숨결들이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포도밭과 어우러진 시는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듣던 시하고는 다르다고 한다. 보고 싶었던 시인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들 한다. 농촌사람과 도시사람,그리고 시인들이 함께 꾸미는 8번째 포도밭 작은 예술제.하늘도 잠시 포도 잎에 걸터앉아 조그만 시골의 소읍에서 펼쳐지는 작은 축제를 감상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