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기자의 Art Story] 나혜석의 미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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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다.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유학한 미술학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애인의 무덤으로 신혼여행 가기,최린과의 불륜,'이혼고백서' 발표,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파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다."정조는 취미다"는 그의 발언은 지금까지 명언으로 남아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경원대교수)가 최근 펴낸 '화가 나혜석'(현암사)은 화가로서의 나혜석을 본격 연구한 책이다.
윤씨는 이 책에서 나혜석을 최초의 여류화가라기보다는 '최초의 전업작가'였다는 측면을 강조한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이 절필했을 때 나혜석은 초지일관 붓을 버리지 않고 제작에 전념했다.
유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고 전시·판매 등을 통해 전업화가의 기초를 닦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는 생전에 인기작가였다.
25세 때인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서울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을 가졌다.
이는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유화 개인전이었다.
이 전시는 당시 장안의 화제가 돼 5000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70여점의 출품작 중 20여점이 고가에 팔렸는데 '신춘'이라는 작품은 판매가가 무려 350원에 달했다.
당시 집 한 채값도 넘는 거액이었다.
이혼 후 제작비 마련과 호구지책의 일환으로 35세 때인 1931년에는 '일본제전'에 출품하기 위해 도일한다.
이 때 일본에서 입선작인 '정원'을 포함한 소품들을 팔아 1400원이라는 거금을 모으기도 했다.
1930년대 작품인 '학서암 염노장'(60.6×72.7cm)은 무일푼에 자식까지 빼앗기고 떠돌이 신세였던 나혜석이 예산 수덕사에 기거할 때 그린 유화다.
수덕사에는 친한 친구였으나 비구니가 되어 수도승의 길을 걷고 있던 친구 김일엽이 있었다.
나혜석은 김일엽으로부터 출가를 권유받았지만 사양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불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20호 크기의 이 작품은 '염노장'으로 불리던 한 비구니스님을 그린 초상화다.
2000년께 공개됐을 때 감정 전문가들 사이에 진위문제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보존 상태가 불량한 것 등이 원인이었지만 두 사람이 진품이라고 증언했다.
현 수덕사 방장인 원담 스님과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 화백(일당 스님)이 그들이었다.
나혜석은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과 가깝게 지내며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원담은 만공스님의 시자다.
수덕사에 어머니를 보기 위해 자주 왔던 김태신 화백도 그 그림을 본적이 있다고 밝혔다.
진품으로 판명난 이 초상화는 지금은 없어진 경매회사인 '마이 아트'가 실시한 2001년 4월 미술품 경매에 출품됐다.
예정가는 1억원을 웃돌았지만 희망자가 없어 유찰됐다.
나혜석 그림은 지난해 서울옥션에도 한 점이 매물로 나왔다.
해인사에 기거하면서 목판에 그린 4호크기의 '홍류동'으로 나혜석의 사인인 'HR'가 있는 데다 뒷면에 해인사 주소까지 적혀 있다.
예정가는 3500만~4000만원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유찰됐다.
윤범모 교수는 "나혜석은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작가로 '홍류동'의 경우 5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며 "그런데도 미술관에서조차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털어놓는다.
다른 시각도 있다.
나혜석 그림은 유통이 별로 되지 않아 시장가격이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대가들의 작품에 비해 선호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인기작가였던 나혜석 작품은 6·25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다.
현재 유작이 30~40점 정도로 추정되는 데 수준 차가 심하다.
또 이들 그림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것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