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0년 전인 1905년 4월4일, 영국 화물선 일포드호(號)는 한인 1033명을 싣고 이름도 생소한 지구 건너편 애네켄의 나라 묵서가(墨西哥)로 향한다. 화물짝보다 더 못한 환경에서 태평양을 건넌 이들은 5월12일 멕시코 땅을 밟는다. 이들은 말이 농업이민이지,노예보다도 더 열악한 조건에서 한걸음 한걸음씩 자리를 잡아간다. 이민 1세대의 비참하고 가혹했던 생활은 젊은 작가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에 잘 나타나 있다. 척박한 땅에 그들의 후손이 한치씩 뿌리내리고 후대의 이민자와 주재자가 가세해 멕시코의 한인은 현재 3만명에 달한다. 한인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노무현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했다. 10일엔 폭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고 11일엔 근사한 한국상품전시회도 둘러봤다. 세계에서 한국이 갖는 위상만큼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있다. 100년 전 한국의 '선량한 국민'을 데려가 노예수준으로 부렸던 멕시코는 이제 한국의 경제력을 의식하는 상황이 됐다.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키로 하고 협상하다가 부담을 느껴서 인지 그보다 낮은 수준의 '전략적 경제보완협정'(SECA)으로 하자며 자세를 낮출 정도다. 한국의 대(對)멕시코 수출이 30억달러인데 반해 멕시코의 대한국 수출은 4억달러 선이니 그럴만도 하다. 100년 사이 위상이 서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좋아진 여건에서 노 대통령은 지난 9일 이곳의 동포들과 만났다. 올해 100세인 후손 대표 고흥룡 옹도 그들 중 한명이다. 고 옹은 1905년 모친의 뱃속에서 태평양을 건넜고 이주자들이 메리다시에 도착한 뒤 태어났다. 그 세대 중 유일한 생존자다. 동포간담회 헤드테이블의 고 옹 옆에 앉은 노라 유 멕시코 연방 하원의원처럼 성공한 이들도 나온다. 노 대통령은 뜨거운 눈시울을 감추지 못하고 한인 후손의 환영사를 들었다. 또 목이 메인채 격려인사를 했다. 한인회의 숙원인 한글학교 설립 지원 약속도 했다. 노 대통령이 억새풀같이 살아온 이국의 동포들과 만나며 '대통령이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다시 한번 절감했기를 바란다. 멕시코시티=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