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업계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통신업체들은 공정거래위원회가 15일 담합을 이유로 과징금 부과 및 시정명령 결정을 내리자 일제히 분통을 터뜨렸다. 업체 관계자들은 "이래 가지고야 정부를 믿고 따를 수 있겠나""이 정부에 산업정책이 있긴 하냐"고 반문했다. "정부가 끌어주지 않고 정책이 불투명한데 무얼 할 수 있겠느냐"는 말도 나왔다. 공정위의 이번 결정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정보통신부의 통신정책 기조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정통부는 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유효경쟁정책'을 펼쳐왔다. 후발사업자들이 선발사업자와 경쟁할 수 있을 만큼 클 때까지 과당경쟁을 막겠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행정지도로 인해 통신업체들이 과징금 부과 및 시정명령을 받았으니 이 정책은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통신업계 불만은 이것 뿐이 아니다. 이중규제에 대한 불만도 커질 대로 커졌다. 정통부 산하 통신위원회는 과당경쟁을 벌일 때마다 과징금을 부과했다. 반대로 공정위는 경쟁하지 않고 담합했다고 철퇴를 내렸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업체마다 대관업무 조직을 강화하며 대응하고 있건만 수십억,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맞기 일쑤다. 더구나 통신업체들의 '체력'은 지금 바닥으로 떨어졌다. KT(옛 한국통신)와 경쟁하라고 키워온 하나로텔레콤 데이콤 두루넷 온세통신 등 후발사업자들이 하나같이 경영난에 처해 있다. 두루넷은 법정관리를 받다가 올해 하나로텔레콤에 인수됐고 온세통신은 지금도 법정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데이콤은 적자에서 허덕이다 지난해에야 간신히 흑자전환했다. 경쟁환경은 이미 '레드오션'으로 변했다. 초고속인터넷의 경우 시장이 정리되는 시점에 케이블TV 사업자들이 잇따라 뛰어들고 통신망 임대사업을 해온 파워콤까지 가세했다. 이 바람에 과다한 초기투자 부담에서 간신히 벗어났던 하나로텔레콤까지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다. 시외전화·국제전화는 인터넷전화의 공격을 받고 있다. 선발사업자인 KT라고 온전한 게 아니다. 주력사업인 시내전화는 내리막길로 접어든 지 오래다. 초고속인터넷도 더이상 '캐시카우' 노릇을 하기 어렵게 됐다. 민영화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적자를 감수하며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 노릇을 해야 한다. 2001년 이후 4년 연속 매출이 11조원대에 머물렀다는 것이 KT가 처해 있는 현실을 대변해준다. 돌파구도 꽉 막혔다. 통신업체들은 수년 전부터 통신·방송 융합을 통해 '블루오션'을 찾으려 했다. 인터넷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전송하는 인터넷TV(IP-TV)가 대표적이다. KT와 하나로텔레콤은 관련 기술을 개발해 놓고 올 여름께부터 상용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빨라야 올 연말에나 시범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상용 서비스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TV와 같은 통신·방송 융합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관련 법제를 정비해야 하는데 정통부와 방송위원회가 좀체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걸기까지 했건만 통·방융합은 도무지 진척이 없다. 이러다간 통·방융합 시대에 한국이 '정보기술(IT)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공정위 철퇴를 맞았다. 정통부를 믿고 따르기 어렵게 됐다는 것은 둘째 문제다. 당장 통·방융합 협상 과정에서 정통부가 과연 통신업계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줄 수 있겠느냐는 회의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통신강국 한국이 통신 후진국으로 전락한다면 그 원인은 무기력한 정통부와 너무 강한 두 위원회 때문일 것"이란 말까지 나온다. 고기완 기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