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와 시민단체가 사법부의 권능을 훼손해가면서까지 기업들을 손보겠다고 달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 국회가 기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조건호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이렇게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현행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8조가 '국정 감사 또는 조사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계속 중인 재판 또는 수사 중인 사건의 소추에 관여할 목적으로 행사돼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는 데도 이 같은 실정법을 무시한 채 기업인들을 국감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조 부회장은 또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들은 국민들 앞에서 제대로 변명 한 마디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곧바로 범죄자로 매도당할 공산이 크다"며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국회가 일부 시민단체들의 여론몰이나 압력에 휘둘리는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사면초가에 빠진 삼성 현재 증인채택 여부를 놓고 가장 뜨거운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기업인은 이건희 삼성 회장.일부 여당 의원들은 X파일 사태와 관련해 이 회장의 증인 채택을 고집하고 있지만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아직 검찰 수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 의혹만으로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인을 부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증인으로 신청된 삼성 내 기업인들은 이 회장뿐만이 아니다.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최도석 삼성전자 사장,배정충 삼성생명 사장,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등 사실상 삼성그룹을 움직이고 있는 최고경영자들이 모두 거론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증인 신청 사유 가운데 상당수가 검찰 또는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사안인 데다 일부는 법적 증거효력이 없는 불법도청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라며 "입법기관 스스로 법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삼성은 특히 정밀 건강검진을 위해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 회장에 대해 일부 언론들이 해외 도피 의혹을 제기한 데 이어 정치인들이 '국제사법공조' '체포조' 등의 단어까지 사용하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의 아찔한 공격 삼성 최고경영자들의 증인석 출석이 해외 시장에서 삼성의 브랜드 가치,나아가 한국 경제의 신인도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는 주장이 일부 시민단체의 선전술에 밀려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삼성의 고민이다. 참여연대의 경우 최근 성명을 내고 "삼성 관계자들의 증인 채택에 있어 각 당과 개별 의원들의 분명한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방청을 통한 모니터링에 나섰다"며 "만약 국회가 '재벌의 힘'에 눌려 증인 채택을 회피한다면 국민의 대표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국회를 압박하고 있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제도적으로 기업인들의 국감 증인 출석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문제는 진짜 증인 채택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 기업인들의 투자 의욕만 꺾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특히 삼성처럼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한 기업에 대해선 '재벌의 스캔들'을 들춰내는 식으로 망신을 주기보다는 소니나 IBM 등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배려하는 마인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안 원장의 견해다. 하지만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안 작성을 놓고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삼성 봐주기' 의혹에 휘말리고 과거 삼성 상용차의 분식회계 의혹까지 국감장에서 거론되자 삼성은 그야말로 곤혹스런 입장에 내몰리고 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요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면초가'를 넘어 '십면초가'에 빠진 느낌"이라며 "우리가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힘 있는 '삼성 공화국'이라면 이렇게 십자포화로 두들겨 맞겠느냐"고 토로했다. 일부에선 시민단체의 기업 공격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는 경계론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시민단체가 정부나 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우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요즘은 마치 정치권 일각의 '2중대' 역할을 하고 있다"며 "X파일과 관련된 참여연대의 대(對) 삼성 공격도 마치 정치권과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수긍 어려운 증인 채택 이번에 증인으로 채택된 대부분의 기업인들도 국회 출석 사유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증인으로 채택된 하이트맥주 관계자는 "하이트맥주는 국제 입찰을 거쳐 진로를 합법적으로 인수했을 뿐인데 왜 국정 감사를 받아야 하느냐"며 "문제가 있다면 차라리 기업 결합을 승인한 공정거래위원회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볼썽 사나운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을 연출한 두산도 현직 총수의 증인 출석에 불만스런 분위기가 역력하다. 계열사 압수 수색 등을 통해 검찰 수사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사안인데 국회에 불려나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입장이다. 조일훈·김형호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