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몸 움츠리고 있는 '아틀라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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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효 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한국의 헌정사를 보면 참여정부처럼 개혁의 기대를 온몸에 받은 정부는 없었다.
김대중 정부도 개혁을 표방했지만,노회한 티를 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개혁'보다는 '부패'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에 비하면 참여정부는 출범초기부터 개혁을 내세웠고, 또 열린우리당도 17대 총선에서 승리하자 개구일성(開口一聲) '개혁'이었다.
실상 이제까지의 참여정부 전력을 보면 큰 권력형 부정부패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선진화된 한국'보다는 '많이 거칠어지고 황폐해진 한국'의 현실을 발견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에 관한 귀책사유에서 보수주의자들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보다 큰 책임은 권력을 갖게 된 진보주의자,특히 386세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을 갖게 된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세력에 대해 '화해와 포용'을 제안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보주의자들은 '화해와 포용'보다는 '단절'과 '청산'을 유난히 강조함으로써 '화해의 사과'보다는 '분노의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부터 잘못됐다"느니,"대한민국의 역사는 반칙과 특권의 역사였다"고 외치면서 건국과 산업화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부친살해'의 정치를 추구했다.
이처럼 단절과 청산이 개혁의 화두가 됨으로써 진보주의자들의 개혁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의 요소로 작용하게 됐다.
법조개혁,학력사회 철폐,언론개혁,정치개혁 등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단순한 '프로정신'의 결여보다 잘먹고 잘살아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분노와 미움 등,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원칙이 개혁의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류로 꼽혔던 삼성과 서울대 등이 각가지 이유로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의 표적이 됐다.
또 1등을 때리기 위해 내놓는 정책이나 법은 무차별적인 공격성을 띠기 일쑤였다.
이처럼 무차별적으로 기득권 해체를 추진한 결과는 무엇인가.
잘나가는 것,반짝거리는 것들을 없애고 모든 것을 사소하고 진부한 범주로 만드는 데 주안점이 두어지는 '평범한 한국'의 도래가 그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명품인재''명품기업' '명품학교' 등 명품브랜드를 억압하는 정치,수월성보다 진부함을 추구하는 리더십,하향평준화를 지향하는 정책으로 어떻게 선진화된 공동체를 일구고 또 가꾸어 나갈 수 있겠는가.
사자의 눈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두 가지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러한 이분법으로는 "돼지발의 진주"의 상황처럼,자연의 아름다움도,별들의 고상함도 사자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처럼 진보주의자들도 세계를 '잘먹고 잘사는 기득권자'와 '억압받고 굶주린 약자'로만 구분했을 뿐,혼자서 100만명을 먹여 살리는 일류기업,일류오너,일류경영자들의 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진보주의자들의 국정비전에서 '일류'는 흘러내리는 모래알에 불과했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진보주의자들이 지칭한 기득권자는 '사실적 개념'이 아니라 '전략적 개념'이었다.
각종 통계수치까지 왜곡하며 "잘먹고 잘살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벌줄까를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기득권 해체를 추진하다 보니 한국의 번영을 지탱해온, 이른바 '아틀라스들'이 하나씩 둘씩 몸을 움츠리고 있다.
아틀라스는 옛날 아프리카에서 온 세상을 떠받치고 있던 거인이다.
세월은 지났어도 한국을 떠받쳐온 한국형 아틀라스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들이 기득권자로 몰려 동네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너도 때리고 나도 때려 '아틀라스들'이 만신창이가 되면 한국의 선진화는 언제 이룩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