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비 시장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종종 발견된다. 최고급 명품이 아니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 넘쳐나는 한편 초저가 제품이 기존 시장을 뒤흔들기도 한다. 광고 하나 없이 입소문을 타고 어느 새 히트 제품의 반열에 오른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가치 소비는 최근의 시장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단면이다. 가치 소비란 '자신의 주관적 만족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순적인 소비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최고 제품을 가장 저렴하게 먼저 제품 선택 단계에서는 철저하게 감성 중심이다. 현재의 소비자들은 제품을 고를 때 제아무리 재질이 좋고,기능이 뛰어나도 명품 브랜드가 아니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이류 브랜드 제품과 가격 차이가 아무리 커도 상관없다. 몸에 걸치는 장신구 등의 기호품에 한정되는 얘기가 아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으려 해도,모처럼의 가족 외식 나들이에도 최고가 아니면 단번에 거부당하기 일쑤다.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의기투합해 가볍게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최고급 멀티플렉스가 아니면 촌놈 취급 당하기 십상이다. 반면 대상 제품을 선택한 후에는 지극히 이성적,합리적으로 접근한다. 내가 선택한 명품 브랜드를 가장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인터넷과 이곳저곳 상점을 찾아 헤맨다. 꼭 정가 판매를 고집하는 정상 매장에서 구매하지 않아도 좋다. 대폭 할인된 가격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때로는 좀 낡긴 했어도 중고 명품숍에 나온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제품에서 만족을 얻는 경우도 있다. 최근까지 국내 화장품 시장 질서를 재편한 저가 화장품은 이러한 욕구에 정확하게 일치했다. 립스틱 하나,파운데이션 하나에 3300원.노점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알려진 브랜드도 없고,변변한 매장도 없고,투박한 포장으로 덧입혀진 그저 그런 제품이 아니다. 화려하고 산뜻한 신세대 감각의 매장이 있고,종업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전문 교육을 받은 느낌이 풍겨 나온다. 더구나 한류 가수 보아에 이어 원빈으로 이어지는 수억원대 톱 모델을 전면에 내세운 광고 컨셉트는 도저히 3300원으로의 연결점을 찾아보기 어렵게 한다. ◆때로는 자린고비,때로는 사치성 소비자 모순적 소비의 두 번째 유형은 더욱 흥미롭다. 몇 해 전 방송을 통해 접한 일화가 있다. 고급 자동차 마니아인 한 젊은 남성이 수억원대 페라리를 구입했다. 평범한 미혼의 직장인인 차주는 상당한 금액의 대출 부담을 안고 있었고 대출 이자와 원금을 갚느라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더없이 행복하다는 고백을 하며 그가 짓던 미소가 기억에 생생하다. 언뜻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얘기다. 하지만 유사한 패턴의 소비 행위가 지금 우리 시장에 일반화하고 있다. 나에게 소중한 제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부자만 비싸고 좋은 것 사란 법 있는가. 최근의 가치 소비 트렌드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나의 주관적 소비만족을 위해서 과감한 지출을 서슴지 않는다. 10평 남짓 좁은 원룸에 살면서 최고급 홈 시어터를 갖춘다. 한번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품목이라서 과감한 것도 아닌 듯싶다. 최고급 사양이 나오면 기존 제품을 중고 장터에 내놓고 주저 없이 새 제품을 수용한다. 또한 소득 한 푼 없는 청소년의 소비 패턴은 어떤가. 수십만원대 휴대폰을 1년이 멀다 하고 바꾸는 이들은 10~20대의 신세대 소비자 집단이다. 소득의 규모로 소비 수준을 단정해서 설명하기 어렵게 됐다. 미혼 시절 쓰던 낡은 가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젊은 부부가 중대형 승용차를 구입하는 일은 별로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기존에는 40~50대나 되어야 가능한 얘기였지만 맞벌이가 일반화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20대 후반 신혼 부부의 가계 수입이 웬만한 대기업 부장,임원급에 육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분산된 소득은 상대적으로 세금 부담도 적다. 충분한 현금 유동성에 걸맞은 합리적인 소비일 따름이다. ◆가치소비 확대의 동기들 가치 소비가 점차 두드러지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정보화의 영향이다. 인터넷,모바일 기기 등 정보화의 진보로 소비자들은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제품에 대해 해박한 정보를 갖게 됐다. 둘째,자기 표현에 솔직한 실속파 소비자가 늘어간다는 점이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라지만 친구에게 빌린 디지털 캠코더로 결혼식 촬영을 해도 오히려 당당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파격적 가격 인하 등의 혜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최고급 패밀리 레스토랑,최고급 극장을 할인 혜택 없이 이용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에 없이 똑똑해지고,자기 표현에 솔직한 가치 소비자들이 늘어간다. 소비의 목표가 '최소의 비용으로 얻는 최대의 주관적 효용 만족'이라는 기초 경제학의 명제를 떠올릴 때 우리 소비자들은 나무랄 데 없이 현명한 경제주체임에 틀림없다. 시장 전반의 소비 행태 변화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긴요한 시점이다. 김상일 책임연구원 skkim@lger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