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빨간불 켜진 인터넷 강국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세계 1, 2위를 다투는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에 빨간색 경고등이 켜졌다. 관공서는 물론이요 대학에서도 인터넷을 통한 각종 공문서 발급을 일단 중단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니 여간 우울한 것이 아니다. 한데 곰곰 생각해보니 인터넷 강국을 향한 경고음은 일찍부터 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10여 년을 훌쩍 넘긴 이야기다. 언젠가 대학을 다니는 사촌 조카 녀석이 자기와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의 성적표를 만들어주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사연을 들어본즉, 친구 녀석이 '학사 경고'를 받았는데 부모님이 아시게 되면 노여움을 넘어 건강이라도 해치실까 걱정되어, 효도 차원에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공문서 위조(?)임은 분명했지만 젊은이다운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큰 우려는 하지 않았다.
한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 고속도로 상에는 점차 노란색 경계등이 이곳저곳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최근만 해도 여론재판으로 인해 부임하자마자 옷을 벗어야 했던 고위 공직자들 사례, 검증되지 않은 스타들의 사생활 정보가 무방비로 노출됐던 이른바 '연예인 X 파일 사건' 등등이 심심치 않게 대중매체를 장식하지 않았던가.
같은 시기 대학가에선 해당과목의 레포트를 다운로드받아 겉표지만 바꾸어 제출하는 학생들이 증가함에 따라 과제를 손으로 직접 써서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교수들이 늘어갔고,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커닝 수법이 점차 고도화됨에 따라 필기시험을 구술면접으로 대치하는 궁여지책이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인터넷 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온 사례들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우리 아이들의 열악한 급식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하는 데 성공한 사례, 선진국에 앞서 교육 현장에 'e 러닝'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사례 등에 비추어볼 때 사회문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쟁점화하여 개선하는 데 성공한 공로, 나아가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확대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미덕은 의당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국정감사기간 중 밝혀진 바,인터넷으로 발급가능한 공문서에 대해 비교적 손쉽게 위변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우리는 천문학적 수준의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이 문제가 해킹 내지 위조 방지기술을 보완 및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진정 '소 잃고도 외양간 못 고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열쇠는 기술의 완성도에 있다기 보다는 기술을 활용하는 인간과 사회의 신뢰 수준 및 성숙도에 달려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일례로 유럽이나 미국에선 본인이 작성한 이력서에 해당이력을 증명하는 각종 서류 제출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으며, 지원자에 대한 추천서 내용이 지원자를 평가하는 데 신뢰할 만한 기준으로 적용되곤 한다. 상호관계상 공고한 신뢰를 전제로 한 이들 관행은 공사(公私) 공히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게 마련이다. 반면 서로에 대한 불신은 상대의 진위를 밝혀내고 거짓을 징계하는 데 과도한 사회적 비용과 불필요한 감정적 소모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상대를 속여 이득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을 가져옴으로써 자신도 불신의 악순환 고리에 발목을 잡히게 마련이다.
인터넷 강국 앞에 켜진 적색(赤色) 경고등을 푸른 신호등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기술적 차원을 넘어 인터넷을 활용하는 구성원 각자의 도덕성과 윤리성, 더불어 사회 전반적 시스템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고히 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