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2) 영국의 기술력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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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영국은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국제 박람회를 열었다. 1776년 산업 혁명 이후 75년 동안 섬유를 비롯한 기술과 산업분야에서 급성장한 영국은 이 성과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다. 유리와 철골로 된 길이 564m의 수정궁(水晶宮)을 지은 것도 이 박람회서였다.
이 박람회를 본 프랑스와 독일은 깜짝 놀랐다. 영국과의 기술 격차가 10년 이상 난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이들 국가는 이후 영국과 과학기술 분야에서 격차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10년 뒤인 1862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 영국과 프랑스,독일 간 기술 격차는 1년 안팎으로 좁혀졌다.
또다른 10년이 흐른 뒤인 1872년에 런던에서 다시 열린 박람회에서 이미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뒤진 기술 2등 국가로 전락했다. 영국은 그동안 자랑스러워 했던 섬유분야에서도 인공 염료인 아날린을 개발한 독일에 뒤처졌다.
당시 영국 언론들은 'Cry For Engineering'(공학을 위한 절규)을 내세우면서 사회 계몽에 나서기까지 했다. '고귀한' 과학은 신사의 관심사가 될 수 있으나 엔지니어분야는 신사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은 서서히 기술강국의 자리를 이웃 국가들에 내주었다. 대신 '금융'산업만 발전해 해외 투자를 통한 이자 수입에 의존하는 자본가의 나라로 변화했다. 특히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대학은 19세기 말까지 공학부를 두지 않는 등 고집을 부렸다.
독일은 이때 국가적인 기술 중시 마인드 아래 이공계 기술인력 양성에 주력했다. 아헨공대 등 수많은 공대들이 19세기 중반에 설립됐다. 프랑스도 국립 폴리테크니크 대학을 산업과 연계된 순수 기술학교로 탈바꿈시켰다. 미국도 업계 주도 대학인 MIT가 1861년에 설립되면서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산업 혁명 이래 100년간 영국이 가지고 있던 기술 헤게모니가 순식간에 붕괴되고 19세기 말 들어서 영국은 모든 산업분야에 경쟁력을 잃게 돼 결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예로부터 물러서게 된다.
이러한 점을 지적한 경제사가 데이비드 란데스는 "이공계 인력의 양성과 확보가 국가 간 경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이었다"며 "자칫 현실에 안주하고 기술에 소홀하다보면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와 기술과 산업에서 턱밑까지 추격해온 중국 간 관계를 시사하는 사례다.
오춘호 기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