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누굴위해 조정하시나요"..당사자 입장 간과하기 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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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대신 당사자 간 합의를 통해 민사상 분쟁을 종결하는 조정과 화해 제도가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법원이 자칫 항소와 상고로 이어지기 쉬운 판결을 내리기보다는 조정과 화해를 선호하면서 신속한 분쟁해결이란 당초 제도 도입 취지가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이 변호사들의 주장이다.
◆조정 받아들이지 않으면 '괘씸죄'로 불리한 판결
올해 초부터 광고 관련 손해배상 청구 소송 원고 대리인을 맡고 있는 H모 변호사는 최근 끝난 1심 판결만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많다.
소송이 진행되자 피고(상대방)는 3억원을 줄테니 사건을 마무리짓자고 제안했다.
그는 보상금액이 작은 데다 처음으로 법정 분쟁으로 비화된 사건인 만큼 법원의 새로운 판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를 거부했다.
재판부는 2억5000만원의 조정안을 제시했지만 같은 이유로 원고를 설득,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재판부는 2억원의 손해배상금 판결을 내렸다.
H 변호사는 "괘씸죄를 적용받아 불리한 판결을 받았다.
조정과 선고를 거치면서 이미 1억원을 손해본 셈"이라며 불필요하게 조정을 부추기는 법원을 비판했다.
◆강제조정만 계속될 뿐 판결은 없다
H 변호사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교통사고 손해배상 사건 전문인 서울 서초동의 L모 변호사는 법원으로부터 판결 한 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다.
상해사고보다 손해배상액을 산정하기 쉬워 단기간 내 판결이 내려지는 사망사건에서조차 L 변호사는 최근 들어 판결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소가 제기된 이후 두 달 만에 열린 첫 공판기일부터 판사는 강제조정을 종용했다.
L 변호사는 피고측인 보험사에 너무 유리하다고 생각해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석 달 만에 속개된 공판에서 법원은 또 다른 강제조정안을 제시했다.
이런 식으로 해당 재판부는 세 번씩이나 강제조정안을 내면서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L변호사에게는 이처럼 판결 없이 법원의 강제조정만 두 차례 이상 제시받은 사건이 지금까지 10여건에 달한다.
양 당사자 중 한 쪽이라도 강제조정에 이의를 신청하면 본래 재판절차로 복귀한다는 민사소송법을 법원이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셈이다.
◆"조정 건수 판사들 인사고과에 반영돼"
법원이 조정과 화해를 선호하는 이유는 조정과 화해로 처리한 사건 수가 인사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이라는 게 변호사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대법원 내 법원행정처 송무국 관계자도 "인사고과에 해당하는 근무평정을 해당 법원장들이 작성하기 때문에 판사들의 조정 실적을 반영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면서도 "조정과 화해가 상급 법원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다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준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10년간 판사 생활을 하다 최근 개업을 한 변호사는 "'법원 내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조정 실적에 대한 통계를 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전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대 교수는 "화해·조정제도가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조정과 화해로 처리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는 실무지침을 마련해야 하고 동시에 무리한 조정을 강요하는 법관들에게는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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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풀이 ]
화해는 재판 과정 중 당사자끼리 합의가 돼 민사 재판이 종결되는 행위를 말한다.
당사자끼리 합의가 안 되면 판사가 화해를 권고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를 화해권고결정이라 한다.
조정에는 판사가 얘기하는 것을 당사자들이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소송을 종결시키기로 하는 임의조정과 우선 판사가 강제적으로 조정하는 강제조정이 있다.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는 화해권고결정과 강제조정의 경우 14일 내에 원·피고가 이의를 신청하지 않으면 재판 절차가 끝나게 된다.
현재 법원이 남발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는 것은 주로 화해권고결정과 강제조정이다.
화해나 조정으로 소송이 끝나면 원·피고는 항소나 상고를 할 수 없고 법원은 판결문을 쓰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