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기원전 고대에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전성기에는 북쪽으로 지중해 연안과 남쪽의 수단,서쪽으로는 나일강 건너 지금의 리비아,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거느렸던 대제국이었다.


파라오의 피라미드와 웅장한 신전이 화려했던 이집트 문화를 대변하고 있지만,당시 경제상의 흔적은 '칸 엘 칼릴리(Kahn el Khalili)'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도 카이로 시내 동쪽 이슬람 지구에 있는 이 옥외시장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인 1382년에 정식 개설된 세계 최고령 전통시장이다.


당시 맘룩(Mamluk.오스만 터키 시절의 총독 이름)이었던 '에밀 자칼 엘 칼릴리'에 의해 세워져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칸'은 시장이란 뜻이다.


현지 상인들은 이곳에 시장이 형성된 것은 길거리에 그냥 서서 거래하던 시절까지 포함하면 800년이 넘었다고 전한다.


카이로에서 유명한 재래시장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알 아타바,가족용품을 많이 파는 아빠세이야,칼등 금속제품으로 유명한 다룹 알 아흐마르,낙타.말.당나귀가 거래되는 사이드 제이납 등이 꼽히지만 역사는 칸 엘 칼릴리가 가장 오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곳은 동서무역의 중심지로 낙타와 말의 마굿간을 갖추고 있어 동양에서 건너온 대상들의 행렬과 이들과 거래하려는 상인 및 수공업자들로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지금도 고작 2~3층짜리로 수백년간 때가 묻은 시장내 건물들과 미로처럼 꼬불꼬불하게 연결돼 있는 뒷골목에 터를 잡고 있는 1000여개의 상점들은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도제를 거느린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진 전통수제품들과 생기 넘치는 시장 분위기가 연출하는 매력과 신비는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이집트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피라미드와 신전 등을 보기 위해 이집트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연간 2000만명에 달하는데,이들 중 대부분이 이곳을 찾는다고 현지 가이드는 전했다.


매년 12월부터 1월 초의 성수기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어른 아이 구분없이 "무조건 1달러"라고 일단 불러 세운 뒤 이런저런 물건을 내놓으며 가격을 흥정하는 풍경도 흔하다.


상점들은 과거 동서무역 때보다는 훨씬 다양한 상품들을 팔고 있지만,당시 동양의 대상들이 귀하게 여겼던 금.은.동제 자기,앤티크 수공예품과 카펫 크리스털제품 등 가정용 장식품,귀금속,향료 등은 지금도 인기가 높다.


외국 관광객들은 이 나라의 국화 격인 파피루스로 만든 달력 등 기념품과 각종 파라오 복사품,금속제 장신구 등을 즐겨 찾는다.


그러나 이곳도 세태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듯 최근에는 10대들의 호주머니를 겨냥해 미국산 청바지와 형형색색의 티셔츠 등을 파는 현대식 가게들이 속속 문을 여는 추세다.


그렇지만 어쩐지 이곳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생뚱맞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또 중국산 저가 '짝퉁'들이 여기에도 대거 들어오고 있지만,이집트의 공업수준이 한참 뒤져 있는데다 국민소득이 워낙 낮은 탓인지 그렇게 싼 제품으로 여겨지지 않아 큰 영향은 없다고 한다.


나이키를 모방한 중국산 짝퉁 신발은 원화로 1만2000원,어깨에 메는 소형 색은 6000~7000원 정도의 가격에 진열돼 있다.


시장의 역사가 긴 만큼 30년 넘게 가업을 지키고 있는 상인들은 수두룩하다.


올해로 42년째 티셔츠를 만들어 팔고 있다는 무하마드씨(50)는 "8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티셔츠에 들어가는 매듭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일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그의 가게(2층)가 들어 있는 건물은 '라바 실레헤도르(남자를 위한 장소라는 뜻)'라고 불리는데 지은 지 650년 됐다고 설명했다.


무하마드는 "티셔츠를 사려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하다"면서 "미국인과 독일.프랑스인들은 카펫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티셔츠는 다른 곳에 있는 공장에서 만들어 파는데 현재 가격은 5달러 정도지만,환율과 금값이 달라지면 바뀐다고 설명했다.


어리숙해 보이는 인상이어서 짐짓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면화값이 달라지지 않느냐"면서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 역시 셈에는 밝은 노련한 상인이었다.


시장 뒷골목 2층 구석자리에서 파피루스 기념품과 소형 동제 그릇.장신구 등을 파는 50대의 조르디씨 역시 30년 넘게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상품 대부분은 가격이 5~6달러 정도였지만,그는 "관광객들이 많은 연말연초 성수기에는 꽤 많은 돈을 번다"고 귀띔했다.


이집트 정부는 이 시장 옆에 조만간 현대식 시장을 개설할 방침이다.


부지면적이 약 600평(2000㎡)에 이르는 이슬람 스타일의 대형몰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 전통시장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하마드는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나 마찬가지"라며 "20대인 아들과 10살이 안된 딸들도 나처럼 계속 이 시장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카이로를 찾는 방문객들은 옛 전통시장의 거리를 걸으며 쇼핑을 즐기든지,현대식 시장을 찾든지 즐거운 선택만 하면 된다는 얘기다.


카이로(이집트)=글 문희수 국제부장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