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그렇게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다.


다만 미국 등 글로벌 금융회사들의 발전 과정을 항상 공부하고 있다는 게 나만의 차별성이라면 차별성이다.


이를 참고해 현재 단계에서 우리 금융 시장에 필요한 것이 뭔지를 늘 고민한다.


그리고 일단 해답이 내려지면 강하게 밀고 나간다."


박현주 회장에게는 늘 '최초의 사나이'란 닉네임이 따라다닌다.


"이런 별명을 얻게 된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박 회장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설립한 자본금 100억원짜리 회사를 8년 만에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신흥 금융그룹'으로 키웠다. 현재 운용자산 규모는 18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그 훨씬 전부터도 '최초'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니며 화제가 됐다.


지난 86년 증권사 영업사원으로 '맨주먹'으로 출발한 그는 33세되던 91년 전국 최연소 증권지점장이 됐고,96년엔 전국 최연소 이사가 됐다.


국내 최초로 연간 주식약정액 1조원을 넘긴 것도,국내 첫 뮤추얼펀드인 '박현주펀드'를 운용하며 '스타 매니저'란 유행어를 만든 주역도 그다.


박 회장은 특히 2001년 미국에서 9개월간 유학을 했던 게 해외 금융 지식을 넓힌 중요한 경험이 됐다고 했다.


당시 증권업계 일각에서는 "정치자금과 연루돼 강제로 '출국'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 회장은 "펀드매니저에서 경영자로 탈바꿈해야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떠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 회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지난 2000년 '박현주펀드 2호'가 증시 급락으로 원금이 손실이 나 고객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청산됐을 때다.


'2호'를 청산한 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박 회장은 현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정상기 맵스자산운용 사장 등 '미래에셋 창립멤버'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실패가 오히려 지금의 박 회장을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