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북관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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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鄭文孚)는 무사의 재능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하려 해도 군사가 없어 산골짜기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병이 궐기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용기를 내 기꺼이 여기에 참가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들의 전승을 기념하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나오는 글로,정문부가 의병에 참가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28세였던 정문부는 북평사라는 낮은 관직에 있었지만 의병장으로 추대돼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관군들은 왜군과 내통하면서 왕자와 신하들을 포박해 그들에게 넘겨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오합지졸의 백성들을 모아 잘 훈련된 2만2000여명의 왜적에 맞서 싸우면서 무려 8차례의 혈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승기를 잡았다면 육지에서는 정문부가 왜군의 기세를 꺾어놓은 셈이다.
충의공 정문부는 충무공 이순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충무공에게 원균이 있었듯이 충의군에게는 북관의 최고 관직을 가진 윤탁연이 있었다.
그는 충의공의 공을 깎아 내렸으며 마침내 역적의 누명까지 쓰고 참혹하게 죽어갔다.
정문부의 억울한 죽음은 44년 후에야 밝혀졌고 전공도 서서히 드러나면서 숙종 때에야 비로소 북관대첩비가 세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이 대첩비는 러일전쟁 중 함경도에 진주한 일본군이 본국으로 가져가 야스쿠니신사의 한 구석에 방치해 버렸다.
전국의 모든 대첩비는 폭파하면서 유독 북관대첩비만을 가져간 것은 관군도 아닌 의병들에게 패한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석의 머리에는 짓누르듯이 갓모양의 커다란 돌을 씌워 놓았다.
'항일의 혼'이 서린 이 비석이 강탈된 지 꼭 100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남북협의를 거쳐 원래 있었던 자리에 넘겨질 것이라고 한다.
북관대첩비 반환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해외에 유출된 7만4000여점의 우리 문화재들도 하루빨리 환수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