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혁신의 핵심 바로미터 중 하나는 규제다. 행정규제가 얼마나 있고,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가 정부의 효율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보면 한국 정부의 혁신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우선 행정규제의 양(量)부터가 확대 일로다. 김영삼 정부 이후 입만 열면 '규제 철폐'를 외쳤지만 행정규제 수는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꾸준히 늘고 있다.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으로 중앙부처와 일선 시·군·구 등의 행정 규제는 모두 7900여건으로 2003년 7822건,2004년 7860건에 비해 계속 증가했다. 정부가 기존 규제를 지속적으로 없애고 있지만,온갖 이유를 들어 새로운 규제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 건수가 늘어난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더 심각한 건 규제의 질까지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은행(IBRD)이 204개국의 정부규제 품질 순위를 매긴 결과 한국의 규제품질은 조사대상국 중 58위에 그쳤다. 지난 2002년 49위에서 9단계나 떨어진 것이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규제개혁추진팀장은 "수도권 공장 신·증설 불허,노동 관련 규제 등 핵심 규제가 여전한 데다 출자총액제한 등 한국에만 있는 기업투자 족쇄장치로 인해 이런 평가를 받은 것 같다"며 "환경·소비자 관련 규제들이 대거 새로 생기면서 기업들의 의욕이 저하되고 있는 데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이 팀장은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규제 개혁을 △규제 완화(less regulation) △규제 품질 제고(better regulation) △규제 관리 등 3단계로 나눠 진행하고 있다"며 "한국은 1단계인 규제 완화 수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규제 완화가 어려운 과제에 대해선 서둘러 2단계인 규제 품질 제고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규제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선 기존의 규제 방식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문이다. 예컨대 서비스 산업의 진입 장벽,금융회사에 대한 동일인 여신 한도와 유가증권 투자 한도 등 각종 사전 규제는 사후 감독 방식으로 바꾸고,출자 규제의 예외 허용이나 근로자파견 업종의 제한 등 허용행위 열거방식의 '포지티브 시스템'은 금지행위만 열거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기존의 모든 규제 관련법을 일정 기간 내에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전환하되,일정 기간 내에 개정하지 못한 법률은 자동 폐기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이를 통해 정부의 경제활동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축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규제품질의 개선을 위해 규제개혁위원회를 명망가 중심에서 전문가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