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동토의 나라로 가서 '러시아판 하이얼'(중국의 대표적인 중저가 가전업체)을 만들어가고 있는 코리안." 13일부터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인케(INKE:한민족 글로벌 벤처네트워크) 대회에 참가 중인 김태철 러시아 HMM 사장(41)은 사뭇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케 모스크바 의장 자격으로 서울을 찾은 그로선 금의환향이기 때문이다.


14년 전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무역학 석사과정을 마친 27세의 청년 김태철은 미지의 땅으로 가는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눈길을 뒤로하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뚜렷한 복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다'는 자신의 인생관에 충실하게 살고 싶다는 젊은이의 기개뿐이었다.


당초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기로 했었지만 그의 눈에는 책보다 비즈니스가 먼저 들어왔다.


한국과 러시아 간에 인적 물적 교류가 급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김씨는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비즈니스를 하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의기투합한 한국인 친구로부터 1만달러를 빌려 현지 상품박람회에 한국상품을 소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92년6월 대학 내 창고를 빌려 '다산 인터내셔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러시아인 동급생 5명을 파트타임제로 고용했다. 다산은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외부시장이던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도시 외국인 회사 1호였기에 시 공무원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푸틴은 2~3시간씩 얘기를 나누면서 애로사항을 파악해서 여러가지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이때 푸틴과 안면을 익힌 다산의 현지인 직원들 중에는 지금 크렘린에서 푸틴 대통령을 보좌하는 이도 있습니다."


한국상품 소개로는 큰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씨는 95년4월 러시아 친구 집을 담보로 LG전자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총판권을 따내 TV 냉장고 판매에 나선다.


김 사장은 이때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 TV를 사면 1년 뒤 원금을 돌려주겠다'는 광고를 내걸었던 것.


"시장 개방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급전직하할 것으로 확신하고 도박을 했죠."


광고는 대히트했다. 한 달에 2만대를 팔았다.


대리점마다 50m 이상 장사진을 치고 2~3시간씩 기다려 사갈 정도였다.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지만 그럴수록 곳곳에 위험도 많았다.


당시 러시아는 트럭 탈취 강도들이 많아 물건을 옮길 때마다 무장경비원을 태워야 했고 도난에 대비,군대 창고를 물류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 사장은 대리점을 20개로 확장하는 저력을 발휘하는 한편 주경야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한국인 1호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호사다마. 가전사업에 멈추지 않고 자동차판매까지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97년5월 현대자동차 딜러 사업권을 따낸 김 사장은 현지 은행과 군 사단장 등을 주주로 끌어들여 현대시티(자본금 300만달러)를 세웠다.


처음엔 당시 러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벤츠를 물리치고 시청에 납품하는 등 판매실적이 괜찮았다.


하지만 98년8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부도위기에 몰렸다.


300만달러를 선지급하고 들여온 승용차(500대)의 현지 판매가격이 400% 이상 뛰면서 소비자들의 발길이 뚝 끊겨버린 것.


"궁리 끝에 현대차 터키공장엘 찾아갔어요.


사정사정해서 승용차 500대를 버스 120대와 바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을버스 업체에 팔아 부도를 겨우 모면했습니다."


김 사장은 "이 고비를 못 넘겼으면 빈손으로 귀국했을 것"이라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회고한다.


고비를 넘긴 김 사장은 사업무대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러시아 HMM '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전자제품 판매에 '올인'한다. 한국의 대표상품으로 뜨기 시작한 휴대폰 MP3플레이어 노트북 등을 들여와 자체브랜드 '이놀(ENOL)'로 판매를 시작했다.


러시아 주요도시에서 열리는 전시회마다 참가했고 대형 유통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홍보활동을 폈다.


"예견한대로 얼마 안 있어 러시아에도 IT 바람이 불면서 판매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현재 이 회사의 현지 거래처는 72개. 작년에 3400만달러 매출을 올린 이 회사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올해 매출 1억달러를 돌파한다.


"내년엔 모스크바에 자체 휴대폰단말기 공장을 세우고 한국 벤처기업을 위한 '인케IT단지'도 조성합니다.


러시아에 중국의 하이얼같은 전자메이커를 만들 겁니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