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조류독감, 차분한 대응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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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悳煥 < 서강대 교수·과학커뮤니케이션 >
동남아시아에 이어 유럽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조류 독감이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1억5000만명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유엔의 경고다.
우리 정부도 자칫하면 100만명이 입원하고 3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2년 전 '급성 중증호흡기증후군'(SARS)의 망령이 되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조류독감은 기러기와 같은 겨울 철새에 기생하는 바이러스가 철새의 배설물을 통해 닭이나 오리에 옮겨가서 생긴다.
본래의 숙주인 철새와는 사이좋게 지내던 바이러스가 낯선 숙주에 놀라서 함께 자폭(自爆)해버리는 것이 문제다.
감염된 닭이나 오리가 면역 체계를 갖출 틈도 주지 않고 끔찍한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비롯한 미생물에 의한 감염성 질환의 역사는 정말 길다.
미생물의 감염이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가져온 재앙이 아니라,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기본으로 하는 생태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런 재앙의 정체와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게 됐고,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예방과 치료도 가능하게 된 것은 현대 과학과 기술 덕분이다.
사실 조류독감의 정체를 미리 파악해서 위험 경보를 울릴 수 있게 된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발전이다.
조류독감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겨울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인플루엔자)'이었다.
아침에 열이 나기 시작했던 환자가 저녁이면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정체불명의 괴질이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북극의 에스키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인이나 감염 경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뾰족한 대책도 마련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는 죄수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 실험까지 했지만 밝혀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잠깐 동안의 소동으로 5000만명의 무고한 인명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됐다고 추정할 뿐이다.
20세기의 끔찍했던 괴질 소동은 곧바로 역사에 묻혀 버렸다.
아무도 가슴 아픈 옛 일을 들춰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탓에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에 대한 역사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달랐다.
대학원 학생이었던 요한 훌틴은 스페인 독감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북극 영구 동토(凍土) 지역의 공동 묘지를 파헤쳤다.
1951년의 일이었지만,DNA의 정체도 알지 못했던 당시에는 아무 소득도 얻을 수가 없었다.
끈질긴 훌틴은 1997년에 북극으로 되돌아가서 80년 전에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던 중년 여인의 뼈 조직을 찾아냈다.
그 덕분에 미군병리학연구소의 제프리 토벤버거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정체를 완벽하게 밝혀내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류독감과 비슷한 돼지독감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했던 1976년 미국 정부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미국 정부는 돼지독감이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불확실한 짐작과 정밀하지 않은 백신 접종으로 엄청난 예산을 낭비했고, 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희생됐다.
지금으로서는 밝혀진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예방책이다.
달걀을 이용해서 배양한 백신과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충분히 준비해두는 것도 중요하다.
보다 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치료제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제약회사 로슈를 설득할 필요도 있다.
자연이 지나친 욕심으로 환경을 파괴해버린 인간에게 내린 냉엄한 천형(天刑)이라는 자조와 한탄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가오는 먹구름에 당황해서 허둥거리기 보다는 냉정한 과학적 이성을 유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