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지난 20일 내놓은 담화로 대북사업 전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북측은 현대아산 임직원의 방북도 막아 대화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보려던 현대측의 실낱 같은 희망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기다리는 수밖에 대안이 없다"는 현대 관계자의 탄식에선 답답함을 넘어 절망마저 느껴진다. 이번 사태는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의 개인비리 문제에서 촉발됐다. 일각에선 현대그룹 신(新)실세들의 '김윤규 몰아내기' 시도라거나 오너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보다 더 오너처럼 행세했던 김 전 부회장이 자초한 결과라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그게 본질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 전 부회장에게서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발견했고 더 이상 그가 달라진 환경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최고경영자가 내렸다는 점이다. 현정은 회장이 북측을 '형제'에 비유하면서도 김 전 부회장은 '종기'로 표현할 정도라면 시아버지와 남편이 그토록 아꼈던 사람을 내쳐야 했던 그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달라진 현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협박성'으로 보기에 충분한 이번 담화에서도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북한이 시스템보다는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래도 북측은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그래도 남북경협 사업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측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담화엔 명시적으로 표현돼 있지 않지만 남측 기업의 인사와 경영에 간섭하려는 태도는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남북관계의 기본 전제를 뒤흔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북측이 '현대 길들이기'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대북사업을 하겠다는 또 다른 '현대'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무리한 요구 조건을 내걸면 내걸수록 남측의 '친구'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북측은 명심해야 한다. 류시훈 산업부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