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칼럼]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말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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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민 < 본사 주필 >
미국의 경제학자 존 K 갤브레이스는 20세기 후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근대 경제사상사를 되돌아보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론'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 등 시대변화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경제철학이 존재했지만 오늘날엔 현실경제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만한 시대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기획특집으로 영국 BBC의 전파를 탔고 이를 1976년에 책으로 내놓아 호평을 받았던 내용이다.
느닷없이 이런 딱딱한 얘기를 화두로 삼은 건 요즘의 우리 상황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곳을 들여다 봐도 혼돈의 와중(渦中)에 휘말려 있다.
상식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국가정체성이 관심사로 등장할 만큼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가 하면 경제성장에 대한 정부의 생각은 무엇이고,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정책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정당의 새로운 정책강령(政策綱領)으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를 제시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복지사회 실현,가능성의 재분배를 위한 교육과 기회의 평등,지식기반형 중소기업 육성,인적자본 중심의 국제경쟁력 강화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겠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정치개혁 등 좋은 정책방향은 총망라돼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분배와 복지를 핵심가치로 내세운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래 줄곧 제기돼 온 '좌파정책' 논란에 다시 불을 지핀 것과 다를 바 없다.
또 하나의 불확실성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라는 구호 자체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사회통합과 시장경제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시장경제의 생명인 '경쟁'을 '갈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제 양극화 등을 경쟁의 결과가 아닌 갈등의 산물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도 양극화 해소나 중소기업 육성 등의 대책은 당연히 강구해야 하고,지금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른바 시장실패 영역에 대해 정부가 보완 역할을 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사회통합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치 양극화가 전혀 없는 시장경제의 영역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오도하는 것은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이고,정치적 술수에 의한 현혹에 불과하다.
행여 정부여당이 독일에서 만들어져 유럽에서 광범하게 채택됐던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념을 추구하겠다고 한다면 그대로 표방하는 것이 차라리 좋다.
강령의 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고 국민들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채택한 유럽국가들이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경제로 회귀하고 있는 마당에 뒤늦게 받아들이는 것을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숙제로 남는다.
어쨌든 참여정부 출범 이후 줄곧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란에서부터 진보냐 보수냐 등의 이념논쟁으로 불필요한 국력을 낭비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성장활력을 잃고 시름시름 앓고 있다.
기업들은 돈을 쌓아 놓고도 투자를 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지갑을 오히려 닫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도 2년 반 가까운 국정수행기간을 남겨놓고 있는 집권여당의 정책강령이 또다시 이념논쟁을 증폭시키고 국정의 중심축을 흔들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국가존립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성장동력을 부추겨야 할 집권 여당이 오히려 불확실성을 확대 재생산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기업의욕을 꺾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정말 난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