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씨 8번째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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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효서씨는 흔히 '유목형 작가'로 불린다.
80년대 사회현실을 파헤치는 세밀한 리얼리즘에서 90년대 개인의 내면을 탐사하는 모더니즘을 거쳐 신비주의와 낭만주의적 성향까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구씨가 최근 내놓은 8번째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창비)에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운명의 주제에 천착한다.
표제작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의사에게 시한부 삶 판정을 받은 마흔일곱의 암환자가 자신이 태어난 옛집을 찾아가 정확한 탄생시각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나'는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태어난 시점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출생시각은 "널 낳고 나니깐 아침 햇살이 막 뒤꼍 창호지문 문턱에 떨어지고 있더라"던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호한 증언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기억에 의지해 고향집 방안에서 아침 햇살을 기다리던 '나'는 아침볕이 문턱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생명이 '사십육년 전 오늘,오전 열시 육분 사십오초'에 시작된 것을 확신한다. 그 순간 주인공은 그가 태어나서 죽음을 맞을 그 자리에서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환영(幻影)을 목격한다. 삶이 탄생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영겁 속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올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소금 가마니'는 시골에서 평생 두부만 만들다 죽은 한 어머니의 신산스런 삶을 그렸다.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어머니의 유품에서 놀랍게도 키에르케고르의 일본어판 책 '공포와 전율'이 나온다. 책에는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고 메모까지 돼 있다.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인내했던 어머니의 깊은 내면 속에 처녀시절 마음에 품었던 지식인 청년의 그림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집에는 이 밖에 죽음을 질병인 듯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앗쌀람 알리이쿰',배호의 노래로 인생의 허무를 견뎌내는 '달빛 아래 외로이',한 여인의 러시아 망명과 유랑의 삶을 그린 '자유 시베리아',사랑을 자기 과신쯤으로 아는 바보들을 조롱하는 '스프링클러의 사랑2' 등 모두 9편이 수록돼 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