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포럼] 기록, 그까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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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막힌 노릇이다.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 제헌헌법 원본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최초의 국새도 감쪽같이 행방을 감췄단다.
국가기록원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없다.
제1~5차 개정헌법도 필사본을 원본인 줄 잘못 알고 귀중기록물 보존서고에 보관해 왔을 정도라면 국가기록물 관리 실태가 어떠한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역대 대통령과 관련된 것일수록 부실의 도가 더하다는 데서는 말문마저 막힌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중요 기록물을 철저히 챙기도록 독려하면서 우리 시대 역사를 후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는데 앞장서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들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없애버리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청와대를 떠나면서 트럭 몇 대 분량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간 경우까지 있었다니 국가기록물이 충실히 관리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부실 관리가 비단 국가 중요기록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런 행태를 연출하는 사람 역시 최고권력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반 공무원사회 기업조직 등을 막론하고 사회 전체에 이런 행태가 만연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일(對日) 통상외교를 담당했던 한 공무원은 기자에게 이런 고백을 한 일이 있다.
"일본 공무원과 협상을 하다보면 도저히 이겨내기 어렵다.
전임자(前任者)들과의 대화기록까지 자세히 들먹이며 나오는 탓에 자연히 그 쪽 페이스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 공무원은 한 분야에서 장기 근무를 하는데다 전ㆍ후임자 간에 활동기록도 철저히 인수인계되는데 우리는 툭하면 실시되는 인사 때문에 전문성도 뒤지고 기록의 인수인계도 잘 되지 않는다는 한탄이었다.
기업 조직 역시 크게 다를 게 없다.
담당자만 바뀌면 업무가 이어지지 않아 제로 베이스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업무 과정에 대한 기록이 전임자의 머리 속에만 들어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후임자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 "어떻게 제대로 된 참고자료조차 하나 없냐?"며 전임자를 비난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막상 자신도 떠날 때면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우리 모습 아닌가.
심지어 비싼 돈을 들여가며 외국기업 산업시찰을 하는 경우에도 갈 때마다 똑같은 질문만 되풀이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앞선 시찰자들의 방문이 개인적 경험으로 끝나버린 탓이다.
세세한 것까지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고 이를 매뉴얼화해 지속적으로 승계해 가면서 회사 발전으로 연결시키는 일본이나 독일 등의 문화와는 정말 거리가 멀다.
그러니 국가경쟁력도 뒤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 우리는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해례본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등을 유네스코의 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킨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기록으로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치밀하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선조들의 기록정신,기록문화야말로 오늘 시급히 되살려야 할 유산이다.
이봉구 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