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라사(羅紗)'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기성복의 스피드와 저가 물량 공세에 밀려 서울 소공동 일대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양복장들.


이들이 르네상스를 시도하고 있다. 한때 기능올림픽 금메달 '먹었다고' 태평로 네거리에서 오픈카 타고 꽃가루 맞던 양복 장인들이 고작(?) 28만원짜리 맞춤 양복으로 재기를 꿈꾸고 있다.


양복장 부활의 노래를 선창하는 이는 정근호 라이프어패럴 대표(58). 그는 작년 겨울부터 동료 양복 명장들을 한사람씩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명장 타이틀이 밥 먹여 줍니까.


양복장이 양복을 짓지 않고 타이틀만 갖고 있으면 뭘합니까? 소비자들이 양복장을 찾도록 만들어봅시다."


홍근삼,이종섭,김기수….정 대표가 찾아다닌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한 명장들이다.


이들이 짓는 양복은 최고급 수입원단을 쓸 경우 한 벌에 250만원.


정 대표는 공임만 100만원을 받아 온 일류 장인들에게 20만원대 맞춤 양복사업을 제안했던 것. 당연히 초기 반응은 냉담했다. "어떻게 그런 싸구려 옷에 내 이름을 거냐…"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 서울의 내로라 하는 맞춤 양복점들이 줄줄이 망해 나가는 판이었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터였기에 그러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오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익히 짐작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줄기차게 설득했습니다."


정 대표가 '시스템 오더' 방식의 '반(半) 맞춤 양복'의 사업성에 확신을 갖고 실행계획서까지 제시하면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자 차츰 반응들이 달라졌다.


"고객이 미리 제작되어 있는 견본을 입어 보며 DB에 들어 있는 300개의 패턴 중 하나를 고르죠.양복기술자가 신체 특징을 꼼꼼히 체크해 큰 줄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합니다.


이것이 수치화 돼 공장에 전송되면 곧바로 재단과 봉제가 시작됩니다."


기성복과 다른 점이 뭘까?


300개의 패턴 하나하나에 명장의 손길이 미치기 때문에 맞춤복 수준의 품질을 보장한다고 정 대표는 주장한다.


"명장들이 각자 20~30년간 양복을 지어봤던 경험을 집대성 해보니 한국 사람의 신체 특성이 300가지 정도로 분류가 되더군요."


고객은 자신의 체형에 맞춘 양복을 일주일이면 입을 수 있다.


정 대표와 양복장 부흥운동에 참여한 양복 명장들은 자신의 양복점 쇼윈도에 '맞춤양복 28만원'이라는 팻말을 내걸었다.


일종의 체인스토어 홍보 효과를 노린 것. 이종섭 이성우양복점 대표는 감개무량해 한다.


"지난 10년간 단골 외에 새 손님이 없다가 싼값에 이끌려 새 손님들이 생겼습니다."


싼값에다 맞춤양복의 품질에 대만족한 초기고객 1명이 보통 10명 안팎의 손님을 소개해주고 이 중 한 두 명은 고가 수제 맞춤 고객으로 이어진다.


이 덕분에 매출이 작년에 비해 두 배나 올랐다.


단골이 된 오준민씨(38·서울 능동)는 "속는 셈 치고 한 벌 구입해 봤는데 이젠 이 양복 아니면 안 입는다"며 "연말보너스를 받으면 수제 고급도 주문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차동윤 제일모직 남성복 총괄상무는 "소규모 양복점들이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으로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면서 "기성복 매출을 잠식한다기보다는 블루오션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양복 한 벌로 100만원을 남기면 고객 1명의 기쁨이지만,5만원 남는 양복 스무 벌을 팔면 같은 수익을 얻으면서도 고객 20명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며 "오랫동안 일감이 없어 거의 손을 놓다시피했던 양복장이들이 다시 일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