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노트라인 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에 있는 독일 노동조합총연맹(DGB). 독일 노동운동의 총 본산이지만 외견상 여느 건물과 다른 점이 없다. 10층 높이의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가 정말 노동조합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차분하다. 빨간 머리띠를 두르거나 조끼를 입은 노조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투쟁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나 유인물 역시 눈에 띠지 않았다. 노조원은 대부분 재킷을 입고 있었고 가끔 넥타이를 맨 조합원도 보였다. 한국의 노동현장에서 투쟁구호가 적힌 유인물과 빨간 조끼에 익숙해 있던 기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 사진 : 독일노총 소속 노조원들이 지난 8월 기민당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이 같은 조용한 분위기와 달리 독일 노동조합은 변화하지 않으면 존립기반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평등과 분배에만 매달려온 노동세력의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적 압력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효율과 고성장을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고복지 저효율에 신음하는 독일 경제를 살려줄 유일한 '구세주'로 인식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현재 독일의 최대 화두는 경제개혁. 어떻게 하면 경제의 군더더기를 잘라낼 수 있는가가 관심거리다. 노조가 경제침체의 주범으로 지탄받으면서 사회적 힘의 추는 노동계에서 사용자쪽으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다.


지난 10월27일 독일노총 본부에서 만난 독일노총 소속 한스 뵈클러재단의 도르스텐 슐텐 노동정책 및 단체교섭 선임연구원(경제학 박사)은 "독일에는 신자유주의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며 "언론 정치권 모두가 독일병의 책임을 노동계에 떠넘기고 있지만 대놓고 반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 국민도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뿌리를 둔 노조의 복지.분배노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우파 정당인 기민당은 물론이고 노동계의 지지로 정권을 창출해 왔던 사민당 조차도 분배를 강조하는 노조를 귀찮은 존재로 인식할 정도다. 슐텐 연구원은 "예전엔 노조와 사민당의 관계가 가까웠으나 지난 2003년 개혁정책인 '아젠다 2010'이 추진된 이후 양측의 밀월관계는 깨졌다"고 말했다. 아젠다 2010이란 과거 사민당의 슈뢰더 정권이 추진했던 개혁프로그램을 말한다. 기업의 노동비용이 많다는 비난이 높아지자 연금보험 의료보험 실업보험 등에 대한 기업의 부담을 축소하고 실업급여액 삭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독일 경제는 실업률이 11%에 달하고 경제성장률은 1%에도 못미치는 침체의 늪에 빠져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아젠다2010보다 더욱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기민당과 사민당 대연정이 합의한 노동자의 해고요건 완화 방안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 방안은 새로 채용된 근로자에 대해선 2년 이내에 해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입사한 지 6개월이 지난 근로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해고할 수 없도록 보호해왔다.


개혁 바람은 산업현장에도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임금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미 지난해 독일 최대산별노조인 금속노조(IG메탈)가 사용자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 이 같은 변화는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는 노조가 더욱 많이 변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독일 금속사용자단체 노트라인 베스트팔렌지역협회의 한스 마이클 바이스 노사담당이사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이제 노조도 성장과 기업경쟁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현재의 개혁 수준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독일 노총 지도부는 진퇴양난에 처해있다. 개혁바람에 저항하자니 경제침체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쓸 것 같고,그렇다고 찬성하자니 노조원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게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한스 뵈클러재단의 슐텐 연구원은 "현재 독일에서 불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배격하고 케인즈주의적 입장에서 노동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며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개혁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왜 힘으로 개혁프로그램을 막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노조의 파업동력이 떨어졌다"고 대답했다.


뒤셀도르프(독일)=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