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부 시절 국정원이 사회 각계 각층 주요 인사 1천800여명의 전화 통화를 상시 도청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도청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도청에 쓰인 유선중계통신망 R2에 저장된 휴대전화 번호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삭제되고 추가된 게 아니라 한번 저장된 이후 장비 폐기 시점까지 계속 보관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한번 전화번호가 들어오면 굳어버렸다. 현안이 있을 때마다 계속 번호가 저장됐고, 1천800명 선에서 멈췄다"고 설명했다. ◇도청 지능화…`걸려온 전화'도 도청 = 국정원은 1999년 9월 R2 6세트를 이동통신사의 상호접속교환기와 KT 관문교환기가 연결돼 있는 광화문, 구로, 혜화, 신촌, 영등포, 영동 등 6개 전화국의 유선중계통신망에 연결했다. 현재 서울 시내에는 15개 전화국이 있고 유선중계통신망 관문기가 설치된 곳은 10여개 이상이다. 국정원은 `카플러'라는 자체 개발 장비로 통화량이 많고 주요 기관과 시설이 밀집한 지역의 전화국 6곳을 골라 R2와 유선중계통신망을 연결했다. 국정원은 1998년 5월께 R2 1세트를 시험 개발했을 때 무작위로 도청했지만, 차츰 성능을 보완해 원하는 전화 통화 내용만 엿들을 수 있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국정원 R2 수집팀은 사무실에서 32명이 3교대로 매일 24시간 상시 도청하는 방식으로 장비를 운영했다. 입력된 휴대전화로 통화할 때는 물론이고 이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는 것도 도청할 수 있다는 사실도 검찰 조사에서 파악됐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항의하며 단식 농성 중이던 박종웅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화 통화 도청도 박 의원에게 김 전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걸려든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YS는 자신의 대변인 격인 박 의원이 단식 농성을 하자 전화를 걸어 "언론상황이 심각하고 경제문제도 역시 심각하다"며 "나라가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이런 정황을 놓고 볼 때 실제로 도청 대상에는 상시 도청 대상인 1천800여명이 알고 있던 지인(知人)들도 포함됐다. 누구라도 단지 도청 표적이 됐던 특정인에게 전화했다는 이유만으로 도청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통령 `별보(別報)' 둘러싼 논란 = 검찰은 구속된 두 원장을 상대로 도청 대상자를 선별한 과정과 보고 체계 등을 집중 추궁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임 전 원장 때 1천800여명이 누적된 것과 관련,"선별 기준은 알아볼 계획이나 현안이 발생하면 전화번호가 추가 입력됐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향후 수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과연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도청 내용이 어떻게 보고됐느냐 하는 점이다.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구속)은 첫 공판에서 권노갑씨 특별보좌관이었던 최규선씨를 도청한 뒤 이 내용을 임 전 원장에게 보고했고, 임 전 원장은 2000년 6월께 `최씨가 권씨 보좌관으로 호가호위한다'는 내용의 `별보'를 김 전대통령에게 올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두 전 원장이 대통령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도청을 저질렀다며 DJ와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별보라는 게 뭘 지칭하는지는 모르겠다"며 의혹의 시선이 김대중 전 대통령 쪽으로 쏠리는 점을 경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등 2002년 도청 문건 유출 의혹 관련 인사들을 소환 조사하다보면 국정원 도청 자료 유출 부분으로 수사 초점이 옮겨질 것으로 보여 `별보' 부분은 적지 않은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