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당시 동원금융지주(현 한국투자금융지주)는 옛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했다. 이후 동원증권과 합병,한국투자증권이 탄생했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찰떡궁합'이라고 했다.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재무구조가 탄탄한 동원증권과 공적자금을 수혈받았지만 명가(名家)의 전통을 갖고 있는 '덩치 큰 약골' 한투증권과의 결합은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통합 한국증권 앞에는 꿈 같은 결혼식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이혼법정 같은 혼란이 놓여 있었다.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고 고객들은 자금을 빼 나갔다. 합병 시너지는커녕 경쟁력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두 조직의 만남이 가져온 파괴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지난 10월부터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조가 6개월에 걸친 파업을 접고 무분규를 선언했다.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감수하면서 원칙을 끝까지 지킨 경영진이나,파업 일변도의 투쟁 방침을 과감히 버린 노조나 모두 박수받을 만한 일이었다. 상처가 아물자 곧바로 새살이 돋아났다. 고객들이 다시 돌아왔고 수탁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영진은 성과급을 지급하며 화답했다. 파업이 끝난 지 10여일 만이다. 한국투자증권의 모회사인 한국금융지주의 외국인 지분율은 지난 6월 31%에서 단숨에 40%를 훌쩍 뛰어넘었다. ◆새로운 키워드 'IB-AM' 한국투자증권(한국증권)이 지향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투자은행이다. 기업금융(IB)과 자산관리(AM)를 미래의 핵심역량으로 잡았다. 주식매매 중개를 주력 사업으로 하는 '복덕방형 증권사'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골드만삭스'로 발돋움하겠다는 생각이다. 오는 2020년에는 자기자본이익률(ROE) 25% 이상을 달성,명실상부한 금융 명가가 되겠다는 장기 비전도 세웠다. 한국증권은 정부가 증권사의 업무영역을 대폭 확대해 금융투자회사 설립을 허용키로 하면서 대형 투자은행의 꿈을 현실화하기 위한 대내외 여건이 모두 갖춰졌다며 반기고 있다. 이런저런 진통은 있었지만 통합 한국증권의 첫 실적은 괜찮았다. 올 상반기(4~9월)에 734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노조 파업에도 불구하고 일궈낸 성과다. 옛 한국투신증권이 전기(2004년 10월~2005년 3월)와 전년 동기(2004년 4~9월)에 각각 760억원과 69억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것에 비춰보면 믿기 힘든 수준의 실적이다. 투자 차원에서 보유하고 있던 하나은행 지분 등을 매각해 얻은 영업외 수익을 합친 당기순이익은 1112억원을 웃돈다. 이 추세대로라면 연간 2500억원대의 순이익이 기대된다. 회사측은 3000억원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홍성일 사장은 "증권 시황에 따라 실적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천수답식 수익모델 대신 안정된 수익을 내는 새로운 기업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 변화의 시동을 건 한국투자증권의 새로운 타깃은 '바다 건너 시장'이다. 특히 아시아시장 선점을 서두르고 있다. 최근 중국 및 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투자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투자은행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구상이다. 김남구 부회장은 임원회의 때마다 해외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조업뿐 아니라 금융도 이제 세계무대에 나서지 않고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난달 17일 베트남 베트콤뱅크증권과 합작 투신사 설립 및 한국자본 유치 등을 위한 업무제휴 양해각서(MOU)를 맺고 국내 증권사로는 처음으로 베트남 시장에 진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중국의 대규모 공단 개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지난 8일 홍성일 사장이 중국을 방문,장쑤성 쿤산시(昆山市)가 100% 출자한 창업개발치업유한공사 및 국내 중견 건설사인 우림건설과 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합작법인 설립에 관한 MOU를 맺었다. 지난 6월엔 중국 궈타이쥔안(國泰君安)증권과 중국 기업의 한국증시 상장 추진 등을 지원하기 위한 MOU를 맺기도 했다. 유상호 부사장은 "수익성도 수익성이지만 투자은행으로서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 중국 등에서 충분한 경험이 축적되면 이를 토대로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도 세계 유수의 금융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만 보고 뛴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6월 말 현재 자산 규모 5조7300억원,자기자본 1조500억원,점포망 124개,해외 현지법인 3개,해외사무소 2개,직원 수 2300여명으로 국내 업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실적은 아직 덩치에 못 미친다. 한국투신운용의 수탁액만 하더라도 7월 말 21조5440억원에서 11월15일 현재 18조5430억원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최근 열풍이 불고 있는 주식형펀드 수탁액 역시 1조9761억원으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주식위탁매매 점유율 도 6월 6.24%에서 10월 6.3%로 다소 높아지긴 했지만 지난해 동원증권과 한투증권 점유율을 합친 6.63%에는 못 미치고 있다. 외부에서는 한국증권이 신탁업 진출을 통해 고객자산관리 업무를 더욱 강화할 계획이지만 PB 업무를 강화한 은행들이 앞서 뛰고 있고 공격적으로 추진하는 투자은행 업무도 아직은 검증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홍성일 사장은 "옛 한투증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혼란이 있었지만 노조의 무분규 선언이 나온 후 한 달 만에 회사의 경영 상태나 조직원의 태도 등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