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 > 남해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렸다. 보슬비였다. 대교 건너 불붙는 해안의 충무공 자취를 돌아보고 다시 차에 올랐을 때 보슬비는 제법 굵은 가랑비로 바뀌었다. 물건리와 미조항 사이가 물미라고 했다. 물미를 보기 전에 나는 시인이 쓴 시를 먼저 읽었다. '삼십 리 물미해안,허리에 낭창낭창/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중략)/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노을 비치는 남해 고향을 시인은 바다에 단풍이 든다고 표현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려고 따라갔던 길에 애석하게도 궂은 날씨는 바다를 붉게 물들이지 못했고,그래서인지 해안을 배경으로 돌아앉은 야산 단풍은 색이 더욱 짙었다. 폐교를 개조한 예술촌엔 수십 년씩 손끝을 여물러온 장인(匠人)들의 솜씨가 전시실에 가득했다. 탄복 뒤에 찾아오는 겸손.하다못해 고목을 반들반들 깎아놓은 탁자의 나무 무늬에도 남해 파도와 물결 문양이 어김없이 숨어 있었다. 산 열매엔 산이 들고 들 열매엔 들이 든다. 태산에 지진이 나면 그 산의 쇠를 녹여 만든 풍경이 만리 밖에서도 저절로 운다. 장인의 최고 경지는 자연과 혼연일체,아니 바로 자연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시인 역시 남해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남해가 격랑에 출렁이거나,노을에 발갛게 단풍이 들거나,반짝이는 멸치 떼가 파닥거릴 때 천리 밖에서 시인은 까닭 없이 잠 못 들고 몸살을 앓으며 시를 썼으리. 우리를 환영하러 예술촌에 들른 남해 군수는 고향 자랑에 침이 마르고,객들은 둘러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시인이 낭송하는 시를 들었다. 올봄에 어머니를 여읜 나는 일찍이 고두현의 시 '한여름'을 읽고 갑자기 눈물이 나서 펑펑 운 적이 있다. 시인은 모친을 나보다 먼저 여의었다. 단 석 줄,짧은 한 문장으로 사람을 울린 그 시를 나도 일행 앞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아 이젠 안 계시지….' 시와 포도주가 넉넉히 익어 가는 밤.바깥에는 여전히 가을비가 내리고 사람들 얼굴엔 저녁에 보지 못한 물미해안 단풍이 빛깔도 곱게 내려앉았다. 낯선 사람들끼리 어울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 바라보며 정담 끝에 웃고 시와 술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술이 술을 빚은 이의 것이 아니듯 시인이 쓴 시는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시인이 먼저 느낀 시상을 따라가며 우리는 그렇게 남해바다에 젖어가서 결국엔 남해가 되었다. 신비로운 섬은 하늘의 별도 끌어내리는가. 비 내리는 칠흑 포구 곳곳에 촛불 같은 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살아서 한번 가을,이처럼 벅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복이랴.여기 이 자리에서 문득 죽어도 좋겠다는 절대 감흥은 역설적이게도 오래오래 살아서 영원히 행복하고 싶은 욕심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너무 좋으면,죽어도 좋고 끝없이 살고 싶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그래서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감상 또한 이미 시에는 있다. 나는 철저히 남해의 밤이 빚어내는 시상과 몽환의 늪에 빠져서 죽고 싶을 만큼 행복했다. 요즘 부쩍 문학과 역사,예술이 동행하는 이른바 '테마여행'이 많이 생겨나서 일상을 벗어난 서정과 감흥을 공유한다. 자연이야 본래 계절마다 미치도록 아름답지만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떤 시각과 감상으로 바라보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시인을 따라가면 시인의 눈으로,사학자를 따라가면 역사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볼 수 있다. 그런 체험들이 많아질수록 세상과 인생을 이해하는 폭은 넓어진다. 눈이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여러분도 한번 서둘러 떠나보시라.돌아오는 길은 반드시 떠날 때와는 다를 것이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