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고려 때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崔茂宣)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렇게 치면 중국(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붓통에 몰래 가져와 국내에 개량 목화를 보급했다는 문익점(文益漸)도 못지않게 유명하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간 유방택(柳方澤)은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인물이다. 오늘의 역사 책 어느 곳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요즘 고려 말의 천문학자 유방택을 연구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다. 그는 지금 국보로 지정돼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1395년)'라는 돌에 새겨진 천문도의 천체 관측 책임자였는데,최무선 문익점과 같은 시기를 살았다. 출생연도로 치면 유방택(1320∼1402)-최무선(1325∼1395)-문익점(1329∼1398)의 차례지만,생을 마감하기는 최무선-문익점-유방택 순이 된다. 우리 과학기술사의 주역인 이들 세 사람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셋 모두 이성계의 새 왕조에 반대한 '반동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최무선과 문익점이 얼마나 반동이었던가는 지금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1401년 당대의 대표적 학자관료였던 권근(權近)이 태종에게 상소해 최무선과 문익점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주게 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보인다. 1401년(태종1) 윤 3월 문중용(文中庸)에게는 사헌감찰,최해산(崔海山)에게는 군기주부라는 관직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유방택은 아예 고려가 망하자 세상을 등지고 고향 서산(瑞山)으로 낙향했고,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에 삼은각(三隱閣)을 짓고 1399년부터 고려의 충신 셋을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정몽주(圃隱) 이색(牧隱) 길재(冶隱) 등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킨 세 은(隱)자 돌림의 학자들을 위로하려는 삼은각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하지만 유방택은 그의 아들이 새 왕조를 위해 일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최무선과 문익점의 아들들이 조선왕조에 들어와 특혜를 받아 관직을 얻은 것과는 달리,유방택의 아들 유백유(柳伯濡)는 고려 말 이성계,조준,정도전 일파의 전제 개혁에 반대하는 이색(李穡)의 제자로서 조선 왕조에 들어와 고위 관직을 지냈다. 이렇게 고려 말 과학기술사를 장식한 세 인물은 모두 이성계의 새 왕조 건설에는 반대했지만,그들이 그 후의 역사에서는 서로 다르게 평가되는 모습이다. 조선 초 쓰여진 고려시대의 역사 책 '고려사'를 보면 문익점에 대해서는 그의 일생을 소개한 전기까지 남아 있지만,최무선은 별도의 전기로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고려사'는 그런대로 최무선의 활약은 기록했으나,유방택의 기록은 전혀 없다. 석각 천문도의 설명문 속에서나 그의 이름이 발견될 뿐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태조실록에는 1393년(태조 2) 7월 유방택에게 원종공신(原從功臣)이란 칭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금 보기에 셋은 거의 비슷한 공헌을 남겼건만,우리 조상들이 문익점과 최무선만 높이고, 유방택은 무시해버렸던 것은 왜 그럴까? 아마 목화와 화약의 실용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이들 둘은 고위 관직을 지냈기 때문일 듯도 하다. 그들에 비하면 유방택은 실용성이 떨어지는 천문학자였고,그들처럼 고위직에는 오른 일도 없는 듯하다. 얼핏 고려 말에도 기초과학(즉 천문학)은 무시되고 응용과학(기술)은 나름대로 더 대우받았던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지금 '역사 바로잡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잃어버린 역사 되찾기'가 더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노력 또한 '역사 바로잡기'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는 유방택 같은 잊혀진 영웅들이 많건만,우리는 그들을 발굴해 낼 생각은 별로 못하고 있다. 잊혀진 과학자들을 찾아 다시 높이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기초과학 육성에도 크게 도움 될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