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노동운동이 각국 국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한때 사회의 최대 진보세력으로 군림하며 정부정책을 좌지우지해왔던 유럽 노동조합들은 이제 경기침체의 주범으로 지목돼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됐다. 분배와 복지에 대한 노조의 과도한 요구가 결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친노(親勞)정책에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기업들도 더 이상 노조의 눈치를 보지 않고,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을 가속화하고 있다. 노조가 눈총의 대상이 되다보니 노조원들조차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며 노조를 떠나는 상황이다. 유럽에서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노조관계자들도 인정한다. 독일노총(DGB) 산하 한스 뵈클러재단의 도르스텐 슐텐 연구원은 "산업구조의 변화와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노조조직률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며 "이제는 정부가 메스를 들이대도 이에 대항할 힘조차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운동이 침체된 가장 큰 요인은 세계화에 따른 경쟁격화와 경기불황"이라며 "많은 국민들이 경기침체 원인을 노동조합의 분배노선으로 돌리고 있어 노조는 더욱 코너로 몰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럽에서 노조가 얼마나 외면받고 있는지는 주요국의 노조 조직률이 전후 가장 낮은 수치로 떨어졌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지난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35%를 웃돌던 독일의 노조조직률은 2003년에는 26.6%로 떨어졌다. 노조조직률 하락을 막기 위해 지난 90년대 후반 5개 서비스노조가 단일노조로 뭉쳐 통합서비스노조(ver.di)를 탄생시켰지만 대세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이 거대 단일노조는 통합 당시만 해도 노조원이 300만명에 육박했지만 2003년 261만4000여명,지난해 246만4000여명으로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이 같은 현상은 독일 내 최대 파워를 자랑해온 금속노조(IG메탈)를 비롯 운송노조,화학·에너지노조 등 모든 산별노조에서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파업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노동운동 역시 설땅을 잃어가긴 마찬가지다. 지난 80년대 중반 16%였던 노조조직률은 90년대 중반 11%로,2003년에는 다시 8.8%로 시간이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프랑스에는 강성노조인 노동총연맹(CGT),노동자의 힘(FO)과 온건노선을 걷는 민주노총(CFDT),기독교노총(CFTC),직제관리총동맹(CFC-CGC) 등 5개 상급노동단체가 노동계를 분할하며 극렬 투쟁을 주도해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투쟁동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프랑스 노조들이 정부의 개혁정책에 맞서 각종 시위를 벌이고는 있지만 대부분 단발성이다. 지난 9월 프랑스 정부가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신(新)고용정책을 도입했을 때도 노동계는 한달쯤 지난 뒤에야 행동에 나섰다. 그나마도 하루 동안 항의성 파업을 벌이는 데 그쳤다. 노조의 이러한 변화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무분별한 파업으로는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노동부의 아나이스 브레오 노사관계국 부국장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노동운동은 투쟁문화가 지배해 왔으나 좌파정책을 밀어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영향 탓인지 한발 물러서 사용자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분위기"라며 "이제 프랑스 노조들도 공존을 모색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점을 절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조의 힘이 약해지면서 프랑스 내 노사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노동계에서 "민간기업들이 노조간부에 대해 승진을 안 시킨다든지,인기 없는 부서로 발령내면서 노조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프랑스 민주노총(CFDT)의 스턴데 작게 고용교육훈련부장)는 불만이 나올 만큼 노사 간 힘의 균형이 노동계에서 재계로 급속히 옮아가는 추세다. 유럽의 '빅3' 중 노조에 대해 가장 먼저 개혁을 단행한 영국에선 노조의 파워가 훨씬 더 약해졌다. 1980년대 대처 수상 시절 노동단체들이 '힘을 남용하는 무책임한 독점집단'으로 비난받으면서 노조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노동법이 잇따라 입법화됐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권이 잡은 뒤에도 대처의 개혁정책은 그대로 이어져 아직도 대처가 영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영국은 경제가 살아난 지금도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행동권 등에 많은 제약을 가하고 있다. 우선 노동자들이 쉽게 파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또 파업을 벌여도 자칫 하다간 자신만 해고당하기 일쑤여서 어지간해선 파업을 생각지도 못할 정도다. 뒤셀도르프(독일)=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