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 keykim@kitech.re.kr > 21일 새벽 중부지방에 첫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남지역은 5mm에 달했는 데도 내리자마자 녹는 바람에 적설량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한다. 밤 사이 흔적도 없이 다녀간 도둑눈 소식에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기야 공식적인 첫눈은 1cm 이상 눈이 내렸다고 기상관측소가 발표하는 경우에 한해서라고 하니, 아직 진짜 첫눈이 내린 건 아니라고 우겨도 될 것 같다. 첫눈은 평균 11월19일을 전후해서 내린다. 살얼음이 어는 시기,절기로 치자면 소설(小雪)이다. 예전의 겨울에는 눈이 참 흔했다. 식구 수대로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놓는 아이들 때문에 지나가는 행인들조차 그 집 식구가 몇명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설(初雪)도 제법 풍성해서,시멘트·비료포대만 있으면 뒷산 언덕배기도 썩 훌륭한 눈썰매장이 됐다. 속옷까지 젖도록 눈썰매를 타고 돌아 온 마당가에는 장독대 항아리마다 똑같은 높이의 하얀 모자들이 두툼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풍경은 옛 추억이 되고 말았다. 내리는 눈이 신기해 혀를 내밀고 먹어도 봤지만,산성 눈 때문에 어느 결엔가 스치는 것조차 피하게 됐다. 심지어 한반도의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바뀌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35년 사이 연평균 기온이 2.7도나 올랐고,아열대성 식물들이 번성하기 시작했으며,꽃 피는 시기를 종잡을 수 없게 됐다. 21세기 안에 한반도의 연평균 기온이 16.2도가 될 것이란 비관적인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이는 현재 제주도의 연평균 기온 15.5도보다도 높은 수치다. 그렇게 되면 수도권 인근의 스키장들은 일제히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따뜻한 겨울이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눈 많은 지방에 정(情)도 많다는 옛말대로라면,우리가 잃는 것이 비단 눈 덮인 겨울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전 세계적으로 환경보전과 에너지 절약,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노력이 확산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엄청나게 사용되고 있는 석유 및 석탄연료,환경파괴가 지구온난화 현상을 촉진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연료절약과 대체에너지 개발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시인 정호승은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첫눈 오는 날 만나고 싶은 그리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누구라도 예외 없이 환경 보전에 힘써야 할 의무를 지게 됐다. 우리 국민들의 의지와 실천이 모아져야 할 때다. 삭막한 세상일망정 눈 녹일 온기는 남아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넉넉하게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