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이냐 아니면 항복이냐.세계 전자업계가 요동 치고 있다. 한 쪽에선 세(勢) 불리기를 통해 절대 강자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선 분루를 삼키며 항복 문서를 쓰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전장에서 어떤 기업의 전략가도 감히 앞날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이른바 '밀레니엄 특수'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세계 전자업계의 지형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당시의 판도는 군웅할거였다. 저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패권 장악을 자신하며 시장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수 기업들의 분할 점령이 아니라 소수의 독과점 강화로 나타났다. 대세의 흐름을 타지 못한 많은 전자업체들이 중도에 탈락했기 때문이다. 이제 살아 남은 기업들은 다시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제휴 구도는 더 이상 새삼스럽지도 않다. ◆도전받는 절대 강자 2000년 낸드플래시 메모리 업계의 세계 최강자는 일본 도시바였다. 도시바는 삼성전자가 1990년대 종합 전자업체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제공한 기업이다. 1998년 도시바는 그동안 해오던 대로 삼성에 플래시메모리 기술을 제공할 테니 생산라인을 합작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하지만 삼성은 이를 거절했다. 그로부터 불과 3년이 지난 2001년 도시바는 삼성에 쉽게 추월당했다. 삼성이 자사와의 협력 없이 독자적인 경쟁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도시바는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 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하며 2.5t 트럭 한 대분 수출에 2000억원의 돈을 쓸어담는 것을 침울하게 지켜봐야 했다. 도시바가 허무하게 패퇴하자 이번엔 비메모리 사업의 절대 강자 인텔과 한때 세계 2위 메모리 업체로 군림했던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손잡고 삼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런 상태로 삼성의 독주를 허용하다가는 세계 전자업계 패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인텔이 이 사업에 전격 뛰어든 것은 최근 삼성이 IBM 퀄컴 등과의 제휴를 통해 자신의 텃밭인 시스템LSI 시장을 넘보고 있는 데 따른 응징의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이다. 1970년대 세계적인 컬러TV 보급기를 틈타 TV 시장 주도권을 거머쥔 소니의 '30년 천하'도 끝장났다. 소니가 디지털TV 시장 확대에 보수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사이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맹렬한 기세로 돌진,기존 강자인 마쓰시타 필립스 등과 함께 '5강 구도'를 형성했다. 소니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당장 실지(失地)를 회복하기는 힘겨운 여건이다.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가 양분하고 있는 액정표시장치(LCD) 업계에서는 최근 대만의 추격이 위협적이다. 대만은 2003년 36.0%의 점유율을 기록해 40.7%를 차지한 한국과 4.7%포인트의 격차를 갖고 있었지만 지난해에는 그 격차를 2.0%포인트 차이로 좁혔다. 반대로 유럽과 일본 업계가 과점하고 있던 휴대폰 시장은 한국 업계의 돌풍에 휩싸였다. 2000년 5%에 불과했던 국내 업체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올해 20% 선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과 LG의 거센 도전에 세계 1위 노키아는 5%포인트의 시장 점유율을 잃었다. 한때 휘청거리던 세계 2위 모토로라는 최근 신제품 몇 개를 히트시키면서 기사회생하는 모습이다. ◆구조조정 태풍 몰려온다 지난 5년간의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일본 업계다. 한국이 LCD와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분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자 일본 업체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5~6개 업체가 난립했던 일본 LCD 업계는 샤프와 IPS알파테크놀로지의 양강 체제로 재편됐다. PDP 분야에서는 후지쓰가 사업을 접었고 파이오니아는 사업을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PC 업체들은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2002년 컴팩이 휴렛팩커드(HP)에 통째로 매각된 데 이어 지난해엔 PC의 원조격인 IBM이 PC사업부를 중국 롄샹그룹에 팔아 버려 큰 충격을 던졌다. 현대멀티캡 현주컴퓨터 삼보컴퓨터 등의 국내 업체들 역시 중국과 동남아에서 쏟아져 나온 저가 제품들의 홍수에 묻혀 부실 기업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반도체 업계에선 세계 4위권 메모리업체인 독일 인피니언이 구조조정의 전 단계로 D램 사업부문 분리를 발표해 지난 5년간 혼신을 다한 노력 끝에 정상화에 성공한 하이닉스반도체와 대조를 이뤘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