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선 < 연세대 교수·경제학 >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부산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데 이어 쌀 관세화 유예협상에 대한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축하할 만한 일이다. 특히 APEC회의에서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타결을 촉구하는 성명이 채택된 뒤 쌀협상 비준안이 통과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자유무역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알리게 됐다. APEC은 태동때부터 '열린 지역주의'를 표방해 왔다. APEC이 아시아ㆍ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경제협력을 추구하기 위한 지역주의적 협의체의 성격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이 비회원국가들에 배타적인 대우를 가하는 '닫힌 지역주의'를 내세우진 않았다. 오히려 보고르선언을 통해 'WTO+자유화'를 내세워 이 지역 국가들이 세계의 무역 및 투자의 자유화에 이니셔티브를 행사하고자 노력해 왔다. 이렇게 아ㆍ태지역 국가들이 열린 지역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이 지역 국가들에는 경제에 대한 세계주의적 접근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통해 동아시아 국가들,예컨대 일본 중국 한국,그리고 뒤늦게 쫓아오는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은 다른 어느 지역의 국가들보다 세계의 자유무역을 통해 크게 혜택을 받아 왔다. 그러기에 이 나라들이 무역국가(trading nations)라고 불리지 않는가? 이 나라들은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서로 동질적이지 않아서 쉽사리 배타적 경제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APEC을 위해 세계시장과 차별적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애초부터 원치 않았다. 세계주의의 손상은 이들 국가에는 큰 희생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2001년 시작해 2007년까지 마무리하기로 돼 있는 WTO의 도하 라운드가 제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자 APEC 정상들이 도하 라운드의 조속한 협상타결을 위해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 동안 WTO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아온 동아시아의 무역국가들,특히 일본 한국,그리고 중국이 WTO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문제,예컨대 농업보호와 같은 정치적 문제에 힘을 쏟아 왔을 뿐 세계무역 질서에 대한 협상테이블에는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WTO의 국제질서는 하나의 공공재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주도권을 행사하게 하고 협상의 타결이 이뤄진 후 이들 나라들은 무임승차를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도하라운드 자체의 타결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세계주의에 의해 태동된 WTO 체제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쌍무주의적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은 더욱더 WTO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 쌍무주의적 FTA는 WTO의 근본 원리인 비차별 원칙과 위배되는 것이며,여러 나라와의 개별적 협정은 복잡성을 증대시켜 소위 '스파게티 보올(spaghetti bowl)' 효과와 같은 자유무역에 대한 부정적 효과를 지닐 수 있다. 또한 복잡한 규칙과 이에 따른 관료주의는 무역을 위한 행정비용을 크게 증가시킨다. APEC 정상들의 DDA 라운드 타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계기로 우리 정부도 세계주의에 입각한 자유무역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도 DDA보다는 FTA에 심혈을 기울여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건 WTO의 세계주의적 무역질서이다. 지역주의에 의한 FTA는 WTO의 보완적 의미에서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 이제 우리도 세계무역질서의 구축과정에서 주도권을 발휘함으로써 세계무역 11위권으로의 위상을 지킬 뿐 아니라 자유무역으로부터 오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대외경제정책 방향에서 다시금 세계주의에 우선순위를 둘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