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이맘때 대한민국은 사상 초유의 환란(換亂)을 맞아 마치 망할 듯한 분위기였다. 전 국민이 살 방도를 찾아 노심초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기자에게는 환란하면 떠오르는 한 공무원이 있다. 건설교통부 C국장이다. C국장은 경제위기를 벗어나려면 동해 앞바다에서 석유가 콸콸 솟아나든지,아니면 금값에 비유되던 반도체를 펑펑 쏟아내든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산유국 꿈은 기대난망이지만 반도체 대박은 가능하지 않느냐며 삼성전자의 기흥반도체공장 증설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C국장의 뜻대로 기흥반도체공장의 20여만평 증설은 정부 내에서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참여정부는 국민이 느끼는 체감경기와는 상관없이 우리 경제가 건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정부의 강변대로 우리 경제는 환란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 IT(정보기술)산업에서는 세계 강국의 반열에 올라 있고 자동차 조선 등 수출 주력업종들도 잘 나가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의 경제상황 인식이나 전망은 정부와 다소 궤를 달리하고 있다. IT산업을 비롯해 효자 업종들의 글로벌 경쟁 우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과 일본이 자국 IT산업 지원에 적극 나서면서 위기감이 더해지고 있다. 예산으로 기술개발을 지원하는가 하면 자국 기업 간의 세력연합을 유도하고 있다. 모두 우리 기업들을 겨냥한 공세라는 데 이론이 없다. 심지어 IT 후발주자인 중국과 대만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타도 한국'을 외치고 있다. IT와 함께 우리경제의 양대 기둥을 이루고 있는 자동차산업도 최근 심상치 않은 기류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파산위기에 놓인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인 자국의 GM(제너럴모터스)을 살리기 위해 한국 기업에 규제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중국도 규제의 칼을 빼들 태세다. 르노 닛산을 비롯한 선진 기업들의 글로벌전략도 강화되고 있다. 이처럼 국내의 간판 기업들이 국제경쟁에서 갈수록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정작 정부는 기업의 '기(氣) 살리기'보다는 옥죄기에 나서는 모습이다. 안에서 맞는 자식 밖에서도 맞고 다니고,안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은 밖에서도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자기 나라에서 반(反)기업 정서에 시달리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리고 있는데 어떻게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어깨 펴고 싸울 수 있느냐는 게 요즘 만나는 기업인들의 하소연이다. 그래서인지 의욕적으로 내년도 사업계획을 세워야 하는 연말인데도 우리 재계는 조용하기만 하다. 기(氣) 싸움에서부터 외국기업에 밀리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얼마 전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난 C국장을 만났다. 8년 전 자신의 판단이 환란 극복에 작은 보탬이 됐을 것이라며 흐뭇해 했다. 이 얘기를 어느 기업인에게 전했더니 "그때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 칼바람도 불었지만 열심히 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와 국민이 한마음으로 사랑하고 지원하는 분위기도 있었다"며 "경제위기는 사절이지만 당시의 국가적 마인드는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고 했다. 김상철 산업부장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