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 최근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이 40%대의 지지율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당이 20%의 바닥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무려 두 배나 되는 지지율이다. 여당 일각에서는 이런 상태로 가서는 재집권 가능성이 없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고,반면 한나라당은 내년 지방자치단체 선거까지 반년이나 남았음에도 다섯 명의 의원들이 나서서 서로 "서울시장 내가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고 후보경쟁에 나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당은 일찌감치 재집권을 위한 전열재정비에 나선 것이고, 한나라당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정당지지율은 워낙 여당이 죽을 쑤고 있는 터라 야당이 반사이익을 챙긴 것에 불과하다. 정부와 여당의 극심한 편가르기와 이념공세 속에 경제 챙기자는 한나라당의 구호가 먹혀들어가는 것 같지만,솔직히 말하면 지금 한나라당의 경제정책은 그 좌표를 상실한 것 같다는 우려를 자아나게 한다. 그 대표적 징후가 하반기 정국을 뜨겁게 달군 두 가지 쟁점에 대한 한나라당의 속수무책,수수방관,직무유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이고,또 하나는 쌀협상 비준동의안 처리이다. 금산법 논쟁부터 살펴보자. 97년 금산법 제정 후 8년이나 지난 지금 정부 여당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를 명분으로 내세워 대기업들을 압박하기 위해 위헌성이 다분한 소급입법을 추진함에도 불구,보수정당이란 한나라당은 공연히 나섰다간 친재벌당이란 덤터기나 쓴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미동도 않고 있다. 경제관련부처 장관들 다 제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 문제는 법적인 적합성 여부만 따질 게 아니라 국민정서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고,청와대가 공무원을 상대로 특정 재벌과의 비리의혹을 내사하고,청와대 민정수석(경제수석이 아니다)이 나서서 금산법 개정관련 해법까지 제시하는 의아스러운 상황까지 연출했음에도 한나라당은 있을 곳에 없었다. 쌀협상 비준 처리에서 보여준 한나라당의 태도 또한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한나라당은 여당의 표결처리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기까지 당론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10년간 수조원의 혈세가 낭비된 농정의 실패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모습은 없고 협상과정에서의 이면합의 의혹에 편승, 정치공세나 해 논점을 흐리게 하고 농민의 반발을 의식해 당론도 정하지 못하고 의원 개개인의 자유투표에 맡기는 정치력의 실종,보수정당의 실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 표는 반대 51,기권 18,찬성 30으로 나타났다. 이쯤 되면 내놓고 반대한 민노당과 뭐 다를 바 있나 의심스럽다. 작년 초 당내 일부 의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칠레 FTA 비준 찬성을 당론으로 정했던 데 비해 이번 비준안에선 이념적 지향에서 퇴보한 셈이다. 한나라당의 경제정책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나라당이 감세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이외에는 경제정책에 관한 한 여당이나 별다른 차별성이 없다는 최근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나라당이 집권여당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만 챙기기 급급하지, 진정한 보수정당으로서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최대화하려는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농업구조조정을 목표로 내걸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은 없다. 쌀비준 처리에 미온적으로 동의하면서 내년 초까지 대책을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민노당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글로벌 경제 속에 기회를 최대한 포착해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음을 국민들을 상대로 설득하고 기업들이 더 신명나게 뛸 수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감세의 소리만 요란하지 엄청난 세수확장을 수반하는 법안이 한나라당에 의해 남발되고 있다는 것은 한나라당이 일관된 경제정책의 청사진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고도 정권탈환 운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