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마음먹고 화두를 던졌다. 획일주의를 걱정하고 관용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관용을 실천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관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며 "사돈 남말하고 있다"는 비아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그 말 자체는 귀담아들을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 생각과 가치관이 비슷하다면 관용은 필요없다. 그런 세상은 "척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심전심의 세상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는 사람들 간에 생각이 다르고 또 그 차이 때문에 부딪치는 양상이 과격해서 '다양성'을 넘어서 '모순성'을 띠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하면,그 의견이 '틀리다'라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 '틀리다'는 '다르다'는 의미일 뿐인데, 우리는 그 '틀리다'를 '틀렸다'는 것으로 왜곡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틀리다'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라고 단정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스스로 직면하는 문제를 선과 악의 문제,혹은 정의나 불의의 문제로 틀짜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먹은 세대는 젊은 세대를 '덜 익은 세대'로, 젊은 세대는 나이 먹은 세대를 '쉰세대'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들은 같은 산마루에서 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젊은 세대는 '뜨는 해'를,나이먹은 세대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또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없어져야 할 불의의 존재 정도로 생각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수가 없는 진보는 무의미하고, 진보가 없는 보수도 존재이유가 없을 정도로 양자는 상호의존적임을 알아야 한다. 사안들을 선악의 문제나 정의와 불의의 문제로 접근하면 해법은 화끈하지만 평화공존은 어렵다. 정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불의와 타협할 수 있으며,선의 세력이 어떻게 악의 무리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겠는가. 일찍이 황희 정승은 다투는 두 하녀의 말을 들어본 다음 각각 옳다는 판정을 했고 또 그 우유부단함을 비난하는 부인의 말도 옳다고 했다. 이쯤되면 복수의 정답이 있다고 주장할 법도 한데,우리는 왜 굳이 단수의 정답에만 목을 매는가. 아무래도 하나의 정답밖에 없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옳은 것은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밖에 없는 해보다는 수없이 많은 하늘의 별들과 비슷하다. 사형제도 존치의 의견도 옳고,폐지의 주장도 옳다. 왜 이런 모순적 판단이 가능한가. 나는 내 생각과 가치관을 확고한 신념으로 유지할 수 있겠지만,나와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그런 지적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용에는 지성의 겸손이 필요하다. 자기자신의 무오류성을 강변하고 상대방의 오류성을 강조한다면,그것은 교만함이다. 겸손한 지성에 의한 관용이 가능하려면,너무 큰 소리로 정의를 외치지 말아야 한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항상 정의의 칼을 들고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목을 베려고 한다. 심지어 모기를 보고 정의의 칼을 빼기도 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정의란 열정이라는 불꽃에 의해 점화되는 가연성 물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같아지는 획일적인 '붕어빵의 사회'도 거부하지만,또 조그만 일에도 정의를 외치며 칼을 빼드는 독선적인 '공갈빵의 사회'도 싫다. 오직 모든 색깔을 받아들이는 관용적인 '무지개떡의 사회'를 원할 뿐이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관용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려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이 없는 사람들한테 관용을 베풀라고 말하지 말고 솔선수범해서 관용의 전도사가 돼야 한다. 그래야 "너나 잘하세요"라는 핀잔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