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그레이 코리아'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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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거리에 구세군 냄비가 등장하고 낯익은 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올 한 해도 저물어가나 보다.
매년 이맘 때면 마음이 스산해오는 것이 비단 날씨 탓만은 아닌 듯하다.
불경기 탓인가,척박해지는 세태 탓인가,불우이웃 돕기 성금은 해마다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이어지고,선진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오히려 '신(新)빈곤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새롭게 빈곤층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집단이 노인이라는 사실은,무서운 속도로 초고령 사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우리네를 내심 절박한 심경에 빠지게 한다.
2005년 올해 미국은 1945년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60세 환갑의 나이로 접어듦에 따라 '그레이 아메리카'란 애칭을 얻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활력이 감소되고 안정성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주도적이라는 소식이다.
이제 10년 후 2015년이 되면 6·25 전쟁 이후 태어난 우리의 베이비 붐 세대가 바로 환갑을 맞이하게 된다.
'그레이 코리아'도 코앞에 닥쳐 있는 셈이다.
이미 부모를 모신 마지막 세대요,자녀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한 첫 세대가 출현한 상황에서,자신의 노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세대의 당혹스러움이 일부 통계 자료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50대 여성의 재취업률이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잠시 숙연케 한다.
지금의 50대 여성으로 말하면,자신은 미혼 시절 여공으로서 산업화의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했던 세대다.
결혼해서 전업주부로 자녀양육 및 교육에 매진했으나,자녀에게 부양을 기대하자니 아직은 젊기도 하거니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상황에서,남편은 이미 실직 상태요 재취업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앞으로 20년 이상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나 막막한 심정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 50대 여성에게 부여되는 일자리란 것이 대개는 간병인,가정부,생산직 근로자 정도일 텐데,이 자리마저 보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게 마련이다.
이제 이들의 안타까운 경험이 '세대학습 효과'를 가져와,이후 세대를 향해 노후준비를 위한 경종을 울려준다면 다행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후발 고령화 국가로선 선진 고령화 국가로부터 오는 교훈에 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지금 유럽과 미국에선 서구식 부양모델의 한계를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다.
곧 연령분절(分節)주의에 입각해 부양 모델을 설정할 경우,노인세대의 고립이 문제가 되거니와 특히 임종을 눈앞에 둔 노인들만 모여 사는데 대한 노인 스스로의 불만족도가 높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아가 지금 우리 처지엔 다소 사치스러운 고민으로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누가 임종을 지켜볼 것인가"하는 질문도 조심스럽게 부상하고 있다.
가족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온 고유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국가든 시장이든 '보살핌의 상품화'를 시도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덕분에 아이를 키우는 동안 얻을 수 있는 빛나는 기쁨의 순간이 보모나 어린이 집 교사의 몫이 되었듯이,노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일은 노인 요양원의 호스피스 몫이 돼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레이 코리아가 바로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우리의 기대를 국가의 노인복지정책에 걸기엔 정책의 우선순위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아 어째 불안하다.
그렇다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일상화된 기업이 나서 주겠는가,스스로의 노령화로 인해 속앓이 중인 종교 공동체가 맡아 주겠는가? 그럴 듯한 대안도 뾰족한 혜안도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보자니 서글픔이 더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