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고독의 숭고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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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시인.문학평혼가 >
한밤중 거리에서 축복처럼 쏟아지는 탐스런 첫눈을 맞았다.
금세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였다.
이튿날 마당에는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였다.
때맞춰 강추위도 몰려왔다.
읽어야 할 책도 있고 써야 될 원고도 있었으나 내팽개치고 게으름을 부렸다.
빈 들은 눈에 덮여 있고 호수의 물결은 바람에 일렁였다.
오후 4시가 넘자 날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종일 굶었더니 배가 출출했다.
가스레인지 불로 끓인 냄비밥을 김치와 함께 먹고 난 뒤 서둘러 거실에 불을 밝혔다.
개들에게도 이른 저녁으로 사료를 담아주었다.
쩡쩡한 추위 속에 떨던 개들이 종일 꼼짝도 않던 주인이 나가자 반갑게 짖어댄다.
제 어미가 완강하게 젖먹이기를 거부하고 쫓아낸 강아지 세 마리는 저희들끼리 양지쪽에서 몸을 포갠 채 추위를 견뎌내고 있다.
밤이 되면 강아지들도 뚝 떨어진 기온 탓인지 어미가 있는 좁은 집으로 들어갔다.
어미젖을 파고들다가 제 어미에게 물린 강아지의 비명이 잠결에도 간간이 들려왔다.
바람이 마른 풀들을 흔들고 오동나무 가지에 얹힌 눈은 흰떡가루처럼 푸슬푸슬 날린다.
맨발이 시려 얼른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이런 날 가슴에 새순처럼 돋는 쓸쓸함은 치명적이다. 전능한 신은 이런 날 가까스로 능선 위에 벌건 김칫국물 같은 노을 한자락을 걸쳐놓고 그걸로 위안을 삼으라 한다.
하지만 외풍 센 방에서 등은 시리고 마음밭에 천일염 같은 외로움은 서걱거린다.
내게 한때 꽃이었던,한때 열매였던 당신은 내 외로움의 잔을 함께 나눌 수 없다.
나는 외로움에 관한 한 고집 센 비전향 장기수다.
저 건너편 지방도로의 가등들에 불이 들어올 때, 흰눈들이 저녁의 푸른 박모(薄暮) 속에 잠길 때,어리석은 자는 저무는 하늘과 견고한 침묵에 잠긴 땅을 바라보며 몸을 떤다.
'고독은 정직하다.
/고독은 신을 만들지 않고,/고독은 무한의 누룩으로/부풀지 않는다.
//고독은 자유다.
/고독은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고독은 군중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
/목적 위의 목적이다.'(김현승,'고독한 이유')
고독이란 결핍이 만든 정서적 상황이다.
병이다.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한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자주 이 병에 빠져든다.
디지털의 세계 속에서도 이 병은 멸절되지 않는다.
이 병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독의 미덕은 자기를 깊이 돌아보게 하고,사람을 정직하게 만들고,삶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비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독 속에서는 이성과 광기도 입을 다문다.
마침내 고독은 자유다.
우리는 군중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사유의 바다 속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우주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우주 역시 속삭임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새벽,눈떠보니 2시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이윽고 불을 켠다.
가스레인지에 찻물을 올리고 거실로 돌아왔는데 누군가 거실 창문을 톡,톡,톡 두드린다.
뜻밖에도 박새가 닫힌 창문에 부리와 날개를 연신 부딪고 있다.
침실 쪽 창문을 서둘러 열었다.
거침없이 날아든 박새는 장롱 위 구석진 곳에서 조용하다.
나는 다시 거실로 건너와 뜨거운 물에 우러난 차를 한잔 마신다.
몸이 따뜻해진다.
서재에서 책 몇 권 가져다가 이불 밑에 발을 넣고 책을 읽는다.
12월이다.
새벽이다.
바람이 핑핑 분다. 밤나무숲이 둔중하게 운다. 차고 쓸쓸한 인생에 대해 더 이상 겸양하고 싶지 않다. 지난봄의 모란 작약들이 그러하듯,여름달이 그러하듯,먼데서 우는 종소리가 그러하듯,멀리 있는 딸이 그러하듯 한번 흘러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게 진리다. 아직 바깥은 캄캄하다. 별떨기들은 영하의 온도 속에 차고 시리게 응결한 물방울처럼 반짝인다.
마른 흙벽이라도 손톱으로 긁어 입에 넣고 싶다.